남이장군 사당이 왜 용산에 있을까
남이장군 사당이 왜 용산에 있을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2 17: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각지 근처에서 정병 훈련, 새남터에서 처형…백성들이 사당을 지어 추모

 

서울 용산구 용문동 용문시장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가다보면 아파트단지 귀퉁이 오르막에 조그마한 사당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장수 남이장군 사당이다. 남이장군이 용산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남이장군 사당 /박차영
남이장군 사당 /박차영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波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마르리라,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주리오)

이 시는 남이 장군이 26세에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변에서 읊은 시로, 남아의 기개가 넘쳐 흐른다. 하지만 이 시는 그를 시기하는 유자광이 未平國으로 살짝 바꾸어 그에게 역심이있다고 뒤집어 씌워 그를 처형하는 명분으로 이용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남이 장군은 1441(세종 23)에 태어나 1568(예종 원년)27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무리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세조3(1457)에 무과에 급제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시애의 난을 펻정하고 여진족을 정벌한 공로로 26세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유자광 일파에 의해 역모죄의 누명을 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남이장군 사당 /박차영
남이장군 사당 /박차영

 

남이(南怡) 장군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진 만큼 그의 가족들이 시신을 처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억울해 하고 비통해 했다. 문헌에 나타난 바는 없지만, 300년전부터 용산에 남이장군의 넔을 기리는 사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남이 장군의 사당이 용산에 세워진 것은 그가 정병 300명을 모병하고 훈련시킨 곳이 삼각지 부근이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근거로 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원효 2가 거제산이란 동산에 있었으나 1904년 철도부설등으로 주변이 시끄러워 지역유지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영정은 1935년에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남이장군 추모비 /박차영
남이장군 추모비 /박차영

 

제사는 매년 3(음력 41, 71, 101) 지내다가 1972년 당굿을 끝으로 중단하고 매년 간단한 제사를 지냇다. 그러던 중에 1982년 경희대 김태곤 교수의 조사보고에 의해 복원작업이 착수되어 1983년부터 남이장군 당제 행사가 음력 101일에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

 

남이장군 사당제 /사진=용산구청
남이장군 사당제 /사진=용산구청

 

남이장군 사당제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어 용산구의 축제로 발전되었다.

사당제가 열리기 하루 전에는 용산구 산천동 부군당에서 꽃을 받아오는 꽃받기를 한다. 산천동에서 여신을 받들어 모셔오는 의미를 가진 이 행사는, 강릉단오제에서 대관령 산신을 모셔다가 강릉 여서낭에 합사하는 의식과 유사하다고 한다.

꽃받기 행사는 100여 개의 등이 열을 지어 용문시장을 거쳐 산천동 부군당까지 행진하는 축제로 발전시켰다. 올해는 115(음력 101)에 제사를 지내는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참여가 제한된다. 코로나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