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사라지는 시간’…통일이 독일인에 남긴 것
‘빛이 사라지는 시간’…통일이 독일인에 남긴 것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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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자유주의 세대가 겪는 통일 전후 독일 가정의 대하드라마

 

굴락, 트라반트, 트로츠키와 같은 단어는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소멸어다. 공산체제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사람들을 모아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 덜컹거리며 수시로 고장이 나는 동독의 자동차,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공산사회에서 약간의 자유주의적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반동분자 딱지.

이런 것들은 한 세대의 세월을 돌이켜야 떠오르는 유물 언어가 되어 버렸다. 30여년 전인 1989년 순식간에 배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인들은 통일의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에 앞서 40년전, 독일은 패전국이 되어 동독과 서독 정부가 각각 분리된채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 긴 간극 사이에 독일인, 특히 공산치하의 동독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변화를 겪어야 했던가.

한글판 책 표지 /네이버 책
한글판 책 표지 /네이버 책

 

오이겐 루게(Eugen Ruge)의 장편소설 빛이 사라지는 시간’(In Zeiten des abnehmenden Lichts)1952년에서 2001년까지 50년의 시간이 경과하는 가운데 한 가족 4세대가 어떤 삶의 굴곡을 거쳤는지를 대하드라마로 엮어 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환상에 젖어 있는 1세대 빌헬름 포빌라이트, 소련에서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던 2세대 쿠르트 움니처, 변화와 개방의 시대를 살아가는 3세대 알렉산더, 통일이후 자유주의에 취한 4세대 마르쿠스는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사고와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4세대의 집합점은 1989101, 1세대 빌헬름의 90세 생일날이다. 이날은 베를린 장벽 붕괴(1989119) 한달전의 상황이다.

소설은 세가지 구성으로 전개된다.

첫번째는 동독이 붕괴하는 시점인 1989, 원조 공산주의자이자 가족의 1세대인 빌헬름 생일의 묘사다. 등장인물 여섯명이 각기 자신의 시각에서 생일날 상황을 스케치한다.

두 번째는 1952년에서 1995년까지의 연대기적 서술이다. 멕시코에 망명을 갔던 빌헬름 부부, 소련의 굴락에서 강제노동을 한 쿠르트가 이리나를 만나 귀국하고, 아들 알렉산더가 태어나 성장한다. 알렉산더는 엄격한 통제사회에서도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 3세대의 주인공들은 자유연애를 통해 아이 마르쿠스를 낳지만 결국 헤어진다.

세 번째 구성은 2001년 미국에서 벌어진 9·11 테러 직후의 스토리다. 3세대 알렉산더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쿠르트를 만난 후 아버지의 개인유품을 들고 멕시코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가족사의 내력을 들여다본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1989101일 빌헬름의 생일이다. 그 무렵 알렉산더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고, 빌헬름은 아내 샤로테에 의해 독살된다. 스탈린주의를 고집하는 1세대가 죽고, 서독의 자유주의 바람에 젖은 3세대가 망명하는 것으로 동독 체제의 모순과 서독의 우위성을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시집온 어머니 이리나는 알콜 중독에 빠진다. 2년후 그녀는 소련이 해체되는 소식을 라디오로 들으며 삶을 정리한다.

 

소설은 2011년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은 오이겐 루게의 첫 작품이기도 하고, 아직도 후속작이 없다는 점에서 현재로선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 하나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발표와 됭시에 독일 유력주간지 슈피겔의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해 독일 도서상’(German Book Prize)을 수상했다. 2017년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어명은 “In Times of Fading Light”이다.

 

오이겐 루게 /위키피디아
오이겐 루게 /위키피디아

 

소설엔 작가 오이겐 루게의 자전적 요소가 대입되어 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1954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볼프강 루게(Wolfgang Ruge)도 소설의 쿠르트처럼 소련 우랄산맥 지방으로 이주해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죄로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다. 작가의 어머니도 소설의 이리나처럼 러시아인이다.

오이겐 루게는 1958년 부모와 함께 동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물리학 연구소에 일하다가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에 드라마작가가 되기 위해 연구소를 떠났다. 1989녀에 그의 처녀작 '잘못'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하지만 그 공연을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몇 주 전,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망명했다. 소설에서 알렉산더가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작가는 이후 서독에서 희곡작가, 번역가로 활동하며 자리를 잡았고 2009'빛이 사라지는 시간'을 에세이로 먼저 출간한 후에 2011년 장편 소설로 재편집해 출간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이겼을까. 작가는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 동독에서 가족이 소멸하는 과정을 그렸다.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스탈린주의 세대, 저항해 봐야 소용없고 시대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그 다음 세대, 자유주의에 젖어 마약을 하고 술에 찌들고 문란한 여성관계로 가정을 파탄 내는 세대가 어우러진다.

과연 어떤 제도가 인류에게 옳은 것일까. 손자 알렉산더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개인기록을 들고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멕시코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병든 몸으로 빛이 사라지는 시간을 조용하게 맞는다.

 

독일은 1949년에 분단되어 40년후인 1989년에 통일되었다. 우리는 1948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어 벌써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민족이 다시 통일을 한다면, 그 속에 쌀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삶의 굴곡을 겪을까. 물론 독일인이 겪은 혼란과 좌절, 그 이상일수도 있겠지만, 독일과는 무척 다른 상황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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