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 소나무엔 50년 지나도 또렷한 총탄 자국
북악 소나무엔 50년 지나도 또렷한 총탄 자국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5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악 성곽길에 만나는 ‘1·21 사태 소나무’…북한 무장공비 침투의 흔적

 

백악구간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을 끼고 있어 한양도성 코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청와대 뒷산인데다 50여년전에 북한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루트여서 대부분 코스가 최근에야 개방되었고 지금도 일부구간과 야간에는 통제를 한다. 거리는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 4.7km.

혜화문(惠化門)에서 출발했다.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원래의 위치는 현재 대로의 있었다. 일제 시대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경신고 담장으로 사용된 성곽돌 /박차영
경신고 담장으로 사용된 성곽돌 /박차영

 

혜화문에서 경신고 뒷길로 이어지는 골목길의 성벽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성벽의 일부는 학교 담장이나 주택가 축대로 사용되고, 혜성교회 계단 길 양쪽에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일부 구간에서는 성벽이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숙정문 /박차영
숙정문 /박차영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와룡공원, 그 위로 군부대가 나타난다. 백악구간의 백미는 역시 숙정문(肅靖門)이다.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1·21사태 소나무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 /박차영
1·21사태 소나무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 /박차영

 

숙정문에서 백악마루로 가는 길목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121,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벌써 53년이나 지난 사건이다. 1968121일 북한 특수요원 31명이 침투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다. 이를 ‘1·21 사태라고 한다. 북한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북한 특수부대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들은 한국군 복장을 하고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해 야간을 이용해 서울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일단 세검정을 통과해 자하문(창의문)을 지나려다 비상근무중이던 경찰의 불심건문을 받고 정체가 드러났다.

북한 특수부대는 우리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했다. 이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했다.

경찰의 제지를 받은 북한 특수부대요원(당시 무장공비라고 불렀다)들은 122일부터 31일까지 흩어져 인왕산, 부암동, 북한산, 도봉산, 송추, 파평산 일대로 도주했지만, 현장에 출동한 우리 군경에 의해 29명이 사살되었다. 도주자 1명은 북한으로 넘어갔고, 1명을 생포했다.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그의 이름을 따 이 사건을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는 나중에 종교인이 되었다. 도주한 공비는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승진한 박재경으로, 2000년과 2007년 서울에 와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소나무에 총탄 흔적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등산객들에게 망각하기 쉬운 북한의 실체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부가 북한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1968121일 북한 124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였을 대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령 200년이 된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이후 1·21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백악마루 표지석 /박차영
백악마루 표지석 /박차영

 

이곳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곧이어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 백악마루가 나온다. 해발 342m. 이곳에서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 끝나는 구간은 조()였다. 이곳이 바로 천() 구간에 해당한다.

 

창의문 /박차영
창의문 /박차영

 

백악마루에서 급경사를 따라 내려오면 종착지 창의문(彰義門)에 도달한다.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지금은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백악구간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
백악구간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