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시들이 잠들어 있는 노원구 초안산
조선 내시들이 잠들어 있는 노원구 초안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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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후에도 충절 표현, 무덤도 궁궐을 향해…인조때 승극철 부부의 묘도

 

서울 노원구 월계동과 도봉구 창동 사이에 야트마한 동산이 있으니 초안산(楚安山)이다. 해발 114m로 동네 뒷산 정도 높이인데, 산을 잘 가꾸지 않아 아카시아와 갈참나무로 뒤덮여 있다. 단풍이 절정인 이 계절에 초안산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으로 쓸쓸하기만 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 묘지였던 것이다. 초안산도 망자를 편안히() 모신다는 뜻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초안산에는 사대부의 분묘에서 서민의 민묘까지 1,000기 이상의 무덤이 모여 있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은 사적(440)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에 딸린 상석, 문인석, 비석, 동자상 등의 석물도 수백여 기에 이른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민, 중인, 내관, 상궁,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군집을 이룬다. 시기별로도 다양한 문관석과 동자상 등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사회의 장례문화, 석물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이 산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안산 분묘군 /문화재청
초안산 분묘군 /문화재청

 

특히 내관의 분묘가 많다. 따라서 초안산을 내시네 산이라고도 한다.

내관 또는 내시, 환관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조선왕실 내시부 소속으로 궁궐에서 왕과 왕비를 시중드는 남성이다. 이들은 왕의 최측근이었지만 거세한 남자로 살아야 했다. 내시들은 종2품 상선(尙膳)까지 올라갈수 있었다. 높은 자리에 오른 내관은 권력도 있고, 많은 돈도 모으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초안산 내관의 무덤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후손들은 진짜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조선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박차영
조선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박차영

 

그 중에 17세기 내관이었던 승극철 부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와 비석이 관심을 끈다. 기록에 따르면 내관을 지낸 김계한(金繼韓)과 그의 아들 김광택(金光澤)은 초안산에 무덤이 있었는데, 오래전에 양주 효촌리로 옮겨졌다. 다만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承克哲)의 묘는 이곳에 남아 있다.

승극철은 숙종 때 활약한 정6품 내시였다. 비문에는 연양군파(延陽君派)라는 내시 문중을 이루었던 승극철 가계에 대한 기록과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계한의 손자는 왜 승씨일까. 내관은 양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양자가 원래의 성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내시의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모시던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내시에 관해 남아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마을 사람들은 매년 가을에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그후 전통이 끊어졌다가 2013년부터 서울 노원구에서 내시와 궁녀들의 혼을 달래는 '초안산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초안산 정상부의 녹천정 /박차영
초안산 정상부의 녹천정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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