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①…일본군 사조직의 전쟁 음모
만주국①…일본군 사조직의 전쟁 음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07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인 멤버와 잇세기카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일으킨 주역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211027, 일본 육사 16기 출신 소령 3명이 독일 남부 바덴바덴에 있는 스테파니 호텔에서 만났다.

그 세 명은 나카다 데쓰잔(永田鐵山), 오바타 도시로(小畑敏四郞).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였다. 당시 나이는 36~37. 이들은 러일전쟁(1904~1905) 때엔 어려서 종군하지 못한 후배 세대로, 군 내부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으로 키워졌다. 일본은 당시 다수의 중견 장교를 유럽에 파견해 1차 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하면서 배우도록 했다. 특히 독일군제에 대해 일본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 군인은 독일에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바덴바덴에 모인 세 사람은 유럽 정세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공유했다. 이들은 앞으로의 전쟁 형태가 과거처럼 군인들만이 총검으로 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차와 항공기를 투입하고 국토 전체를 전장으로 삼으며, 국민 모두가 전쟁에 동원되는 국가총력전으로 전환될 것이란 관점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長州) 출신 파벌을 쫓아내고 정규육사 출신으로 대체하는데 뜻을 같이 했다.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낸 밀약을 바덴바덴의 맹약이라 한다. 또 세 사람은 스스로를 삼총사라는 의미의 삼바가라스’(三羽烏)라고 불렀다. 이 조직은 후에 일본제국주의를 좌지우지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군부내 사조직으로 발전한다. 한국군의 하나회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일본군 11인 멤버인 도조 히데키,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이시와라 간지. (좌로부터) /위키피디아
일본군 11인 멤버인 도조 히데키,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이시와라 간지. (좌로부터) /위키피디아

 

삼인방은 조직 확대에 나섰다. 우선 아랫기수인 17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끌어들였다. (도조는 1940년 총리대신이자 육군대신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해 패전후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와 함께 네 사람은 같은 연령대 동지를 모았다. 15기에서 18기까지의 육사 선후배가 영입되었다. 이들은 11인의 멤버를 구성한다. 11인회는 1923년 가을부터 매달 한두차례씩 회합을 갖기 시작했다. 함께 모여 새로운 군사지식을 교환하고, 때론 육군의 정책에 사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국가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1인은 도쿄 시부야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후타바테이(二葉亭)에서 만나 프랑스 요리를 먹는다는 명목으로 동지를 모았다. 이때 만들어진 모임이 이엽회(二葉會).

이들은 모임을 확대해 후배 21~25기까지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토론 주제는 다양했다. 전쟁론, 만몽(滿蒙) 개발론, 군내 개혁론등이 논의되었다.

이중에서 만주와 몽고에 대한 권익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최대관심사였다. 만몽 지방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많은 피를 흘려 획득한 곳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192711월의 어느 목요일, 18명의 젊은 장교들이 목요회(木曜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목요회에서는 미·일 전쟁론이 대두됐다. 만주에 이어 중국, 동남아로 뻗어나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 전쟁은 항공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세계 최종전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기려면 중국과 인도차이나를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20~30년간 전쟁 지속이 가능하다, 선행조치로 만주와 몽고를 지배해야 한다.”

이엽회와 목요회는 회원이 서로 겹쳤고, 공유하는 철학도 비슷했다. 나카다 데스잔과 도조 히데키는 이엽회와 목요회의 멤버이기도 했다. 후배들로부터 두 모임을 합치자는 얘기가 나왔다. 목요회는 1929412회 모임을 끝으로 이엽회와 통합했다. 두 조직은 1929519하루 저녁을 살더라도 일본제국을 위해서!’란 뜻의 잇세기카이(一夕會)로 통합했다. 육사 14~2541. 30~40대 중반 육군 엘리트 소령에서 대령으로 전원 육군대학 출신이었다.

 

중국 장춘시의 관동군 사령부 /위키피디아
중국 장춘시의 관동군 사령부 /위키피디아

 

이 이너서클에 속한 장교 중 대수가 만주 관동군으로 배치되었다. 관동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이 만주에 주둔시킨 병력이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뤼순(旅順) 조차지를 이양받아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또 러시아가 건설하던 남만주철도(만철)을 인수받았다. 관동군은 관동주와 만철을 경비하는 수비대로 출발했다.

일본군부에 사조직을 만든 초기 11인회 가운데 만주에 파견된 멤버들이 사고뭉치들이었다. 그들은 도쿄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이들의 음모로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 암살사건과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이들이 만주와 중국에서 저지른 범죄는 후에 연합군의 전범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다.

 

192864일에 발생한 만주군벌 장쭤린 폭살사건의 경우를 보자. 이 사건의 배후에는 11인회 멤버인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가 개입되어 있었다.

장쭤린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북벌군에 패퇴해 동북 3성의 수도 펑톈(奉天, 현재의 선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펑텐에 근접하던 중에 암살자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당시 도쿄 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봉쇄하기 위해 만주군벌 장쩌린을 지원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데 비해, 만주의 관동군은 차제에 장쩌린 군벌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며 도발한 것이다. 고모토의 모의는 도쿄의 내각도 모른채 진행되었다.

장쭤린 암살사건의 진상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밝혀졌다. 중국 첩보원 진비후이(金璧輝)의 애인이었던 일본군 장교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가 도쿄전범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면서 당시의 상황을 폭로했다. 그는 패전후 미군측에 붙어 동료로부터 배신자라고 욕을 얻어 먹었지만, 일본의 전쟁 도발 진상을 폭로하는데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1927년 만주철도 폭파사건도 고모토의 소행이었다. 일본 신문들은 중국 마적단을 주범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일본군 사조직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만주사변 때 만주 펑톈(선양)에 진주한 일본 관동군 /위키피디아
만주사변 때 만주 펑톈(선양)에 진주한 일본 관동군 /위키피디아

 

일본군부의 사조직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었다. 바덴 맹약의 주인공 중 한 사람 오카무라 야스지 대령이 1929년 육군 보임과장에 선임됐다. 이듬해 정기인사때는 오카무라의 덕분에 바덴바덴 4명중 16기 나까다 데쓰잔 대령이 육군성 군사과장에, 17기 도조 히데키 대령이 육군 참모본부 편제동원과장에 임명됐다.

이제 잇세기카이(一夕會)는 일본 군부 중앙에 포진했다. 만주사변 발발 직전인 19318월엔 육군 중앙 주요과장 회의 멤버 7명 중 5명이 잇세키카이 회원이었다. 전략 담당 군사과장, 인사과장, 민간인과 물자를 동원하는 편제동원과장,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구미과장, 교육을 담당하는 제2과장이 일석회에 장악되었다.

1931918일류탸 오후사건(柳條湖事件)으로 시작된 만주사변은 일본 군부내 사조직에 의해 시작되었다. 도쿄 중앙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세명의 일본 관동군 장교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도쿄 정부는 사후에 승인했을 뿐이다. 이후 일본은 점점 전쟁광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만주사변 6년 후 1937년 일본은 만주를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하고(중일전쟁) 이어 1941년 진주만을 기습했다.(태평양전쟁) 3총사와 11인 멤버의 학습대로 전쟁이 진행된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최후를 향해 달려 나갔다.

 


<참고자료>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년 번역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어문학사, 2009년 번역

Wikipedia, Kwantung Army

Wikipedia, 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