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③…푸이, 만주로 돌아가다
만주국③…푸이, 만주로 돌아가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09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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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하라 겐지, 비밀작전 수행하며 청 마지막 황제 데려가

 

만주에 사변이 일어나던 19319, 폐위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스물여섯 어엿한 성년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세 살에 선통제에 올라 여섯 살에 퇴위한 그는 이미 자금성에서 쫓겨난지도 7년째, 톈진의 일본 조계에 일본이 제공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푸이는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제위에서 물러나더라도 황제와 동일한 대우를 해주겠다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약속은 이미 사문화되었고, 황궁에서 쫓겨난 후 가진 것을 죄다 팔아도 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후비인 원슈(文繡)는 황실의 엄격한 규율과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법원에 이혼을 신청했다. 청조였다면 황가의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겠지만, 끈 떨어진 황제는 후궁에게서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곁에는 정비 완룽(婉容)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치를 줄이지 않았고, 아편에도 손을 댔다. 게다가 황후의 일가친척들은 황실에 들어붙어 남은 재산을 축내고 있었다.

황제는 장제스를 미워했다. 허베이성에서 장제스의 부하가 황실의 능묘를 파헤친 것은 용서할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군은 약탈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능묘에서 도굴된 보석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의 구두 장식품이 되었다는 뜬금 없는 루머에도 전직 황제는 화가 났다.

오갈데가 없는 신세,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세상에 그에게 손길을 내민 곳이 있었느니, 일본의 만주 주둔군 즉, 관동군이었다.

베이징에서 활약하던 관동군 대령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푸이의 텐진 거처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귓속말을 건넸다. 그는 일본 육사 출신으로 군부내 사조직인 11인 멤버의 한사람이었다. 직책은 특무기관의 장인데, 말하자면 정치장교였다. 대중국 정책에 필요한 정치공작을 수행하는 첩보조직의 수장인 셈이다.

그는 푸이를 만주로 데려가 점령지의 통치자로 내세우는 작업을 추진했다. 관동군은 일본이 동북 3성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에서 독립을 추구했다는 사기극을 꾸미려 했다. 그러자니 푸이가 필요했다. 푸이는 만주족 황실의 적통이었다.

 

도이하라 겐지 /위키피디아
도이하라 겐지 /위키피디아

 

만주 현지의 귀족과 군벌은 일본의 협력자로 변신했다. 총칼의 위협에 마지못해 부역자가 되었건, 입신영달을 위해 스스로 앞잡이가 되었건 관동군은 손쉽게 동북 3성을 장악했다.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쉽게 만주가 이민족의 손에 넘어간 적은 없을 것이다.

처음엔 만주의 옛지배자들이 눈치를 보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상 군주였던 장쉐량이 비겁하게 도주하자 그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지린성의 군벌 시차(熙洽)는 청의 황족이었는데, 관동군 사단장이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독립을 선언할 것인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를 요구하자 그는 독립 선언을 택했다. 만주사변 발발 닷새째인 923, 지린성은 중화민국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랴오닝성은 펑텐군벌 출신 위안진카이(袁金鎧)가 버티는 바람에 11월초에야 뒤늦게 독립이 선언되었다. 관동군은 위인진카이를 단념하고 창스이(臧式毅)를 성장으로 앞세웠다. 그러자 위안진카이도 관동군에 협력하게 되었다. 일본은 랴오닝성을 다시 펑톈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헤이룽장의 성장 마잔산(馬占山)은 용감하게 일본군에 저항했지만, 관동군에 치치하얼이 점령되고 동료 군벌 징징후이(張景惠)의 설득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이듬해 19321월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마잔산은 곧이어 마음을 돌려잡고 소련에 망명했다가 중일전쟁 때 항일군을 일으켜 일본과 싸웠다.

이렇게 해서 지린, 펑톈(랴오닝), 헤이룽장의 동북 3성이 중화민국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남은 것은 독립한 3성의 괴뢰수반을 모시는 일이다. 그 일은 도이하라 겐지에게 맡겨졌다.

 

도이하라는 영국인 아라비아 로렌스의 역할에 빗대 일본의 로렌스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과도한 비유다. 도이하라는 무장 로렌스와 달리 공작원이었을 뿐이다. 치밀한 음모로 푸이를 만주로 데려가 괴뢰정권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스파이였다.

도이하라는 푸이를 이렇게 설득했다. “일본이 만주 땅에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본은 만주인들이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신생국은 일본이 보증하지만, 국가의 원수는 푸이가 전적으로 책임지게 될 것이다.”

푸이는 도이하라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황제에 올랐다 물러나는 숙명을 거치면서 직관적으로 아첨과 거짓말을 구별할줄은 알았을 것이다. 만주족 간부들은 그에게 일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조언했다. 특히 일본인을 싫어했던 사람은 황후 완룽이었다. 당시 그녀는 19세였다.

 

푸이와 부인 완룽 /위키피디아
푸이와 부인 완룽 /위키피디아

 

푸이는 만주 신생국의 국체가 군주국인지, 공화국인지를 물었다. 관동군은 괴뢰국을 만들 생각이었지, 민주를 군주에 넘겨주거나 민주국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푸이에겐 그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도이하라는 거짓말을 했다. “군주국입니다. 저희들이 폐하를 황제로 모실 것입니다.”

이 거짓말에 푸이는 넘어갔다. 군주국이면 세금이 모두 황실 소유다. 그동안 쪼들리던 살림도 펴지게 된다. 투덜거리던 황족, 시종들에게 물질적 보상이 돌아갈 것이다. 중국의 한쪽 끝이지만 동북 3성은 웬만한 나라보다 크다. 황제국으로 충분하다. 조상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이하라도 조상의 고향에서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했다. 푸이는 군주국가라는 말에 마침내 만주로 가겠다고 승낙했다.

하지만 황후는 끝내 따라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완룽의 저항은 의외로 강했다. 푸이는 우물쭈물했다. 이런 상황이 오래갈수록 일본에겐 불리했다. 장제스 정권은 일본의 만주침공을 규탄하고,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다. 국제연맹은 만주에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만주인들이 스스로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는 푸이를 하루라도 빨리 만주로 데려가 앞잡이로 내세워야 했다.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도이하라는 상하이에 있던 여성 첩보원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를 급히 텐진으로 불렀다. 당시 24살인 이 여인은 청 시조 누르하치의 후손으로, 중국 이름은 진비후이(金碧輝). 그녀의 아버지는 부인 다섯을 두었고, 자녀의 수가 38명이었다. 진비후이는 14번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떠돌아 다녔고 나중에 무일푼 상태로 되어 딸들을 남에게 맡겼다. 진비후이는 일본인 가와시마 로소쿠(川島浪速)의 양녀로 보내졌다. 이후 그녀는 보호자의 성을 따서 일본식으로 개명했다.

동양의 마타하리로 불리는 진비후이는 황족이란 점을 활용해 텐진에 머물던 푸이 부부에게 접근했다. 황후 완룽은 진비후이의 휘황찬란한 에피스드를 부러워 했다. 좋아하는 남자라면 누구든 잠자리를 하고,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만 살고, 귀족이든 실업가든 암흑가의 불량배든 가볍게 사귀는 점,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사교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완룽은 힘없는 황후의 재미없는 일상에 실증을 느끼던 중 이 자유여인을 표본으로 삼게 되었다.

진비후이는 자신이 일본의 첩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완룽에게 만주로 갈 것을 떠보았다. 진비후이는 완룽이 남편과 헤어질 각오를 하면서도 만주로 가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

 

도이하라는 진비후이의 말을 듣고 푸이만이라도 만주에 데려가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푸이를 완룽과 떼어놓으려면 폭력적 상황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1937118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 500여명이 톈진에서 청나라 황실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좌파를 가장한 폭도들은 푸이의 거처 부근에서 총격을 가하고 폭탄을 터트렸다. 무기는 일본이 제공했다. 폭력시위는 3일간 이어졌다. 일본은 텐진 조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로 푸이의 거주지를 보호했다. 도이하라는 푸이에게 일단 만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황후의 반대로 만주로 가지 못했던 푸이는 선뜻 도이하라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완룽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푸이는 일본 상선 단지마루호를 타고 뤼순에 도착했다.

톈진에 남은 완룽은 측실인 원슈(文繡)처럼 이혼할 용기가 없었다. 왕후는 진비후이에게 부탁해 남편 곁으로 가겠다고 했다. 왕후는 일본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에게 버림받고 무일푼으로 내버려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 황후는 얼마후 푸이가 갔던 동일한 루트를 따라 뤼순에 도착해 남편과 재회했다. 이로써 일본은 만주국 수립을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참고자료>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년 번역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어문학사, 2009년 번역

Wikipedia, Puyi

Wikipedia, Wanrong

Wikipedia, Yoshiko Kaw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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