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④…고조되는 일본 군국주의
만주국④…고조되는 일본 군국주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1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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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의 도발에 도쿄 문민 내각 반발…내각 사퇴, 총리 암살 잇달아

 

관동군이 류타오후 사건을 도발하던 1931918,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였다. 그의 문관 내각은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관동군 모험주의자들이 사고를 저질렀다는 소식은 다음날 새벽에 도쿄에 전달되었다. 919일 정오 무렵, 일본 지도층은 만주사변을 놓고 극심한 분열을 일으켰다. 와카쓰키 내각은 불가침 정책을 선포했고, 육군대신은 만주의 미래를 내각과 상의하지 않고 관동군의 판단에 따라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내각과 관동군, 관동군을 지지하는 도쿄 육군본부 사이에 극심한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육군은 사건이 터지자 일찌감치 관동군을 지지했다. 한통속이었다.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3개 사단을 증파해 달라고 내각에 요청했다. 총리대신은 관동군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내각의 명령을 거역하고 조선주둔군을 만주로 파견했다. 와카쓰키는 조선 주둔군에 군사비를 압류했다. 하지만 총리대신은 923일 결국 군부의 압력에 굴복해 만주사변을 동의하고 말았다.

와카쓰키는 역사적 오류를 범했다. 그가 끝까지 군부의 도발을 막았더라면 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된 만주국 수립을 막을수 있었고, 그가 나중에 벌였던 반전운동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우유부단함은 결국 군부와의 마찰로 끝나고 말았다. 와카쓰키는 육군의 항명파동을 거치며 내무대신 아다치 겐조의 거국 내각 주장에 무릎을 꿇고 그해 12월 사임했다.

 

관동군은 본국 정부의 반대와 상관없이 계획을 밀고 나갔다. 일본은 193111월에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로 데려왔다. 장제스는 반역자 푸이가 만주로 가려는 것을 알고 체포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한때 대청 황제였던 푸이는 일본이 제공한 자동차의 트렁크에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푸이는 뤼순(旅順)에 도착하자 바로 일본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호텔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본측은 경호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푸이는 사실상 감금상태였다.

푸이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황제 자리였다. 그는 세 살에 제위에 오른 전직 황제로 다시 황제가 되는 조건으로 만주에 왔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그를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관동군 수뇌부는 푸이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국가체제를 어떻게 꾸리고 수반에게 무슨 대우를 할지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를 하지 못했다. 부역자들 사이에서 장징후이(張景惠) 등은 장스이(臧式毅)를 만주국의 수령으로 내세워 공화국을 세우자고 했고 황족인 시치아(熙洽)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공자의 후손 쿵더청(孔德成)을 산둥성에서 데려와서 황제로 옹립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결정권은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지로 등 관동군 수뇌부에 있었다. 그들은 선통제를 괴뢰정권 수반의 적격자로 판단하고 데려왔다. 그렇다고 당장 푸이를 황제로 옹립하지 않았다. 일정기간을 잘하는지를 지켜 보았다가 황제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1932년 3월 8일 푸이가 부인 완룽과 함께 만주국 집정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2년 3월 8일 푸이가 부인 완룽과 함께 만주국 집정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2년이 시작되자 관동군은 부역자들과 함께 동북 3성의 국가 수립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관동군은 매일 참모회의를 열어 새나라의 국호, 푸이의 칭호, 국기, 수도, 연호 등을 결정했다. 괴뢰정권의 수반은 정해져 있었다. 국호는 만주국으로 정했다. 중요한 것은 국체였다. 그들은 군주제로 할 것인지, 공화정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수뇌부는 일단 공화제를 실시하되 푸이에게 집정(執政)이란 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집정은 로마 공화정에서 국가원수였고, 중국 군벌시대에 일시적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국기에는 5족을 상징하는 다섯 색깔을 그려 넣었다. 5색은 일본족,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을 의미했다. 중화민국이 한족,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회족을 5족이라고 하는 것과 구성인종이 달랐다. 수도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선양(瀋陽)이 아니라, 그 북쪽의 창춘(長春)으로 정하고, 이름도 신경(新京)으로 개명했다. 1932216일 징징후이, 장스이, 마잔산, 시치아 등 만주인 협력자들이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을 찾아가 이런 내용에 건국준비안에 합의했다

만주국 국기 /위키피디아
만주국 국기 /위키피디아

이타가키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푸이를 만났다. 푸이는 설명을 듣고 분노했다. “이것은 대체 어떤 나라요? 이건 대청제국이 아니오.”

푸이는 일본이 대청제국을 복원시켜줄 것으로 착각했다. 푸이가 다스릴 나라는 관동군이 구도를 잡고 부역자 단체가 승인한 나라였을 뿐이다. 이타가키는 그것은 모두가 합의해서 만든 나라이며, 각하를 원수로 추대할 것입니다고 했다.

푸이는 그런 나라는 승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황제의 칭호는 선조로부터 나에게 전해진 것이다. 만일 그것을 포기한다면 나는 불충불효다.”고 했다.

이타가키는 어린아이 다루듯 푸이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새 국가가 얼마 후에는 제국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타가키는 푸이에게 생각할 시간으로 하루를 주었다.

다음날, 이타가키는 쌀쌀하게 어제의 계획에 변경사항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푸이의 측근인 정샤오쉬(鄭孝胥)가 설득에 나섰다. 푸이는 체념하고 일본의 의도를 받아들였다.

 

229일 국제연맹이 임명한 리튼 위원회가 만주국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은 서둘렀다. 리튼 위원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만주인들에 의한 정부를 수립할해야 했다.

31일 건국회의는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고, 국무총리에 정샤오쉬를 추대했다. 이어 39일 푸이가 만주국 집정에 취임했다.

집정에 취임한후 푸이는 관동군 사령관에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는 국방·치안을 일본에 위탁한다 철도·항만·수로·항공로 등의 관리를 일본에 위탁한다 일본군이 필요한 각종 시설을 적극 건설한다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고, 그 임명권은 관동군 사령관에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푸이는 모든 권한을 관동군 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이다.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위키피디아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위키피디아

 

관동군이 만주국 수립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 도쿄는 정정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와카쓰키 내각이 사임한 후 의회는 76세의 원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 총리로 선출했다. 의원들과 원로들은 폭주하는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이누카이를 선택했다. 그가 취임한 직후인 18321월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천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누카이는 사의를 표했지만 천황이 사직서를 반려했다. 이어 220일 총선에서 이누카이의 민정당이 압승했다. 이누카이는 이에 힘입어 군부를 제어하고, 외교적으로 온건노선을 취하려 했다.

이누카이 총리는 일본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내놓은 합의안에 타협하려 했다. 그는 만주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되 자치정부를 두어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총리의 이런 생각은 군부 과격파의 분노를 샀다. 515일 해군장교들이 총리관저로 쳐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조가 총리를 만났는데 이누카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짜고짜 이누카이에게 권총을 발사하려 했지만 총알이 걸려 발사되지 않았다. 이에 이누카이는 내 얘기를 들어보면 이해할걸세”(せばかる)라며 이들을 응접실로 안내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누카이의 설득에 장교들이 행동을 멈추는 듯했다.

이어 또다른 무리가 밀어닥쳤다. 이들은 이누카이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대답해야 소용없다!(問答無用) 쏴라!"고 외쳤다. 장교들이 일제히 이누카이를 쏘았다. 총리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이후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 일본에 파시즘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 것이다.

 


<참고자료>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년 번역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어문학사, 2009년 번역

Wikipedia, Puyi

Wikipedia, Manchukuo

Wikipedia, Inukai Tsuy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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