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⑥…러허사변과 탕구협정
만주국⑥…러허사변과 탕구협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12 13: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쉐량의 마지막 영토도 빼앗겨…평화협정으로 숨 돌리는 장제스

 

러허(熱河)는 우리에게 조선후기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잘 알려진 청 황실의 여름 수도였다. 러허는 거란족의 요()나라 발상지로, 주민은 몽골족이다. 청조가 무너진후 중화민국은 이 지역을 특별구로 관리하다가 1923년 러허성(熱河省)으로 승격시켰다. 면적은 114,000, 남한보다 약간 넓고, 성도는 청더(承德)였다.

러허성은 192812월 동북 군벌 장쉐량이 동북역치(東北易幟)를 선언, 중화민국에 복속할 때 장제스가 장쉐량의 세력권으로 넘겨 줬다. 장쉐량은 동북정무위원회를 구성해 지린, 랴오닝, 헤이룽장의 동북 3성에다 러허를 포함해 4개 성을 관장했다.

19319월 관동군이 류타오후 사건을 일으켜 6개월 내에 동북 3성을 차지했지만 항일저항군을 진압하는 과정에 러허성에까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장쉐량이 권토중래를 꿈꾸며 휘하의 동북군을 퇴각시켜 러허에 주둔시켰다. 일본은 19323월 서둘러 만주국을 수립하고, 반일 저항운동을 진압하기에 급급했다.

 

러허성의 위치 /위키피디아
러허성의 위치 /위키피디아

 

만주를 탈출해 장성 이남으로 넘어온 한족들은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동북민중항일구국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장쉐량의 부저항'(不抵抗) 정책을 비난하고, 장제스에게 항일투쟁을 촉구했다. 비겁한 사람이 목청이 높다. 왕징웨이와 같이 평소 유화론자들이 만주를 잃은 책임을 지고 장쉐량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허성의 주석 탕위린(湯玉麟)은 간신배였다. 탕은 관동군이 주도하는 동북행정위원회에 참가하며 만주국 건국에도 다리를 걸쳤다. 푸이를 옹립하는 문제도 지지를 보냈다. 난징 정부가 보기엔 탕위린은 반역자였다. 장제스는 간첩 활동을 한 탕위린을 해임하라고 장쉐량에게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거절했다. 패장은 알량한 자존심을 고집했다. 내 부하를 왜 당신이 건드리냐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관동군 소속 이시모토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717일 러허성 북쪽에서 항일 유격대가 열차를 습격해, 열차에 타고 있던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를 연행했다. 이 소식을 듣고 러허성 소속 병사 3명이 출동하고, 관동군도 출동했다. 양측이 충돌했다.

장제스는 장쉐량과 탕위린에게 전력을 다해 일본군에 저항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둘은 장제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병력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관동군은 차제에 러허성을 집어삼킬 생각도 했지만 만주 일대에서 전개되는 항일운동을 진압한 한 연후에 러허를 공격한다는 방침을 정리했다.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동북 3성에선 산발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 관동군은 일본에 저항하는 만주인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핑딩산 사건이다.

핑딩산(平頂山)은 랴오닝성 북부 푸순(撫順)에 있는 산으로, 광부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1932916일 관동군은 항일 유격대 토벌작전을 벌인다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희생자가 3,000명에 달한 이 사건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느 기자는 이렇게 썼다. “일본군은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기관총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공포보다 더 훌륭한 통치수단은 없다. 핑딩산 사건에서 보여주듯, 일본의 가혹한 탄압은 만주인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만주인들은 속으로는 일본을 미워했지만, 겉으로는 덤벼들지 않았다. 민중에게 지배자가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다. 무지렁이들은 펑톈 군벌이든, 관동군이든 착취를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쪽을 지지한다. 괴뢰정권은 앞서의 한족 군벌에 비해 인프라도 조금 투자하고 최소한의 먹을 거리를 주어 인민들을 만족시키려 애를 썼다. 그런 방식이 어느 정도 통했다.

 

러허 전투 /위키피디아
러허 전투 /위키피디아

 

만주는 중원의 한족에게는 변두리였고, 청제국 시절엔 만주족의 땅이었다. 중국은 만주 상실에 대한 분노는 컸지만, 군대를 일으켜 만주를 탈환하겠다고 나선 지도자는 없었다. 다만 정치인들에겐 정치적 타격이 컸다. 장쉐량은 왕징웨이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직서를 쓰는 제스츄어를 보였다. 그러나 화북 군벌 쑹저위안(宋哲元)이 장쉐량과 진퇴를 같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장제스는 장쉐량을 그 자리에 다시 꽂아야 했다. 장제스도 소용돌이 휘말려 하야했으나, 장군들이 후임자인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복귀하는 소동을 벌였다.

장제스는 일본이 러허를 침공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223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왜구의 러허 침공은 절대 피할 수가 없다. 아마도 3개월 이내에 쳐들어올 것이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1933223일 일본 외무성은 중화민국에 러허성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중국은 즉각 거부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선 상에 있다. 관동군은 즉각 작전을 개시해 러허를 침공했다. 이번에도 장쉐량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러허 전투는 10일만에 끝났다. 탕위린의 학정이 심해 러허 주민들은 오히려 일본군을 반겼다고 한다. 장쉐량은 탕위린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탕은 재산을 챙겨 잽싸게 도주했다. 그는 펑위샹, 쑹저위안 등 여러 군벌을 전전하며 몸을 의탁했다가 18376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장쉐량은 러허마저 뺏기자 이번엔 진짜 사직서를 쓰고 외유에 나섰다.

 

탕구 평화협정 체결 /위키피디아
탕구 평화협정 체결 /위키피디아

 

관동군의 침략은 러허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지역으로 남하, 베이핑(北平)을 압박했다. 옛 베이징이다. 당시 수도는 난징이었지만 옛수도가 일본에 넘어간다면 심리적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 기회에 밀고 내려갈 만큼 내려가겠다는 심사였다.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을 괴뢰국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난했다. 일본은 이왕 욕 먹을 바에야 할 일은 하고 만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였다. 러허를 삼킨 후 327일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제 열강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어느 나라도 중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탕구 협정에 의한 비무장지대 /위키피디아
탕구 협정에 의한 비무장지대 /위키피디아

 

관동군이 장성 이남으로 밀고 내려오자, 다급한 쪽은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일본의 남하를 중지시키고, 시간을 벌어 공산당 토벌에 힘을 쏟을 요량이었다. 장제스는 서둘러 화평을 추구했다.

협상에서 일본은 고압적이었다. 1933522, 중국과 일본의 대표가 텐진시 탕구(塘沽)에서 만났다. 일본 측은 만리장성 남쪽에서 베이핑(베이징)과 톈진 북쪽을 비무장지대로 둘 것을 요구했다. 비무장지대엔 국민당군이 출입할 수 없으나, 일본군은 감시할수 있도록 했다.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협상이었지만, 다급한 쪽은 장제스였다. 그렇다고 장제스는 마냥 불리한 협상을 맺은 건 아니었다. 비무장지대는 장쉐량의 영토였고, 어차피 장제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1933531일 중국과 일본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탕구협정이라 부른다. 이 협정으로 중국은 사실상 만주국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단기적으로 수모를 당했지만, 장제스는 시간을 벌었다. 그는 그 틈을 공산당 토벌에 활용했다. 탕구 협정 이후 장제스는 대대적은 초공작전에 나섰다. 장제스는 또 독일인 군사고문을 초빙해 군의 현대화를 추구했다. 공산당을 토벌한 연후에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일본은 중국을 압박하기보다 당분간 만주국 4개성을 안정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췄다. 193431일 일본은 푸이를 집정에서 황제로 한단계 격상시키고, 연호를 강덕(康德)이라 했다. 일본에게 푸이는 이용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Rehe Province

Wikipedia, Pingdingshan massacre

Wikipedia, Battle of Rehe

Wikipedia, Tanggu Truce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어문학사, 2009년 번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