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⑦…실패한 일본인 이민정책
만주국⑦…실패한 일본인 이민정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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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5백만 이주계획 수립…만주 지배 목적, 토지 강제수탈 통해 배분

 

1922년말, 일본 야마가타현에서 농업후계자를 양성하던 가토 간지(加藤完治, 1884~1967)는 훈련생들의 하소연에 할말이 없었다. 학생들은 “1년간 농사기술을 배우고 집에 돌아가면 차남과 3남은 물려받을 땅도 없고 돈도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일본은 인구가 과밀했고, 농민은 평균 1정보의 좁은 토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장남은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지을수 있었지만, 차남 이하는 물려받을 땅도 없는 여건이었다.

가토 간지 /위키피디아
가토 간지 /위키피디아

가토는 그 즉석에서 졸업생들에게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곰곰이 궁리한 끝에 농민을 해외로 이민시키면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처음에 조선으로 이민 송출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1931년 관동군이 만주를 집어삼키자, 만주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가토는 만주로의 농업이민 송출계획을 세워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 당국자를 설득했다. 도쿄대와 교토대 농과교수들이 그에게 공감했고, 농림성의 차관과 농무국장이 그의 생각을 전폭 지지했다.

그의 구상은 관동군이 받아들이고, 본국 의회가 19328월 관련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실현되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이민자가 400. 이들은 193210월 만주로 떠났다. 일본인의 첫 만주 농업이민이 시작된 것이다. 시험이민이란 딱지가 붙은 모집은 1935년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자발적 이민자가 적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로 농사를 지으러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만주엔 토비들이 출몰했고, 괴뢰 만주국은 중화민국, 소련, 몽골과 대치하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몰랐다.

일본이 만주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1936년 이른바 2·26 사건 이후다. 일본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지만, 사건 후 집권한 히로다 고우키(廣田弘毅) 내각은 만주 이민을 7대 국책과제의 하나로 포함시켜 예산을 편성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패전한 1945년까지 9년간 만주 이민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만주국에서도 일본인 이민정책은 산업개발 5개년 계획, 북변진흥계획과 함께 3대 국책과제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농업이민을 독려하는 만주국 포스터 /Asia-Pacific Journal
농업이민을 독려하는 만주국 포스터 /Asia-Pacific Journal

 

이민정책의 첫 번째 목적은 만주국에 일본인 인구의 절대수를 늘리기 위한 것이다. 1930년대초 만주국의 인구는 3,000만명이었다. 일본은 20년 동안 100만호 500만명의 일본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20년 후 만주 인구를 5,000만명으로 추정할 때 10%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지배종족 인구가 1할은 되어야 9할의 피지배종족을 제압할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구 이식, 즉 식민(植民) 정책은 제국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프로이센이 폴란드 지역에 독일인을 이주시켰고,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죄수를 유배보낸 것도 식민의 일환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점령지에 지배 종족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졌고, 일본도 만주를 영토화하는 수단으로 식민화를 적극 밀어 부친 것이다.

만주에 일본족이 많으면 당연히 지배에 유리하다. 이민자 중 젊은이들을 군대로 차출할수 있고, 군수용 농산물을 생산할수 있다. 관동군 통치부가 마련한 일본인 이민 요강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방인(邦人, 일본인)을 이식할 필요성은 모국의 과잉인구를 완화할 뿐 아니라, 만몽(滿蒙)에서 제국의 권익을 신장하고, 제국 국방의 제일선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유사시에 쟁기를 버리고 감히 무기를 잡고 일어날 동포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이민정책이 필요했다. 농촌의 과잉인구를 줄이고, 가뜩이나 대공황의 와중에 실업자를 구제하는 대책이 되었다.

 

일본인 청소년을 훈련시키는 만주 직업훈련소 /維基百科
일본인 청소년을 훈련시키는 만주 직업훈련소 /維基百科

 

이민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국내에선 촌과 군 단위에서 이민단이 편성되었다. 1938년 일본 중부 산악지대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군 오히나다촌에서 이민을 송출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이민 모집과 송출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민 응모자는 늘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만주로 이민 가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한족과 마찰이 격화될 소지가 있었고, 현지에서 군대에 차출될 가능성도 컸다.

일본이 군국화하면서 이민 정책도 군사적 차원에서 활용되었다. 일본은 전국에서 16~19세의 소년들을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모집했다. 패전 때까지 10만명의 청소년들이 의용군을 지원해 만주로 건너갔다. 청소년의용군은 일본내 우치하라(內原)흔련소에서 2개월간 교육을 받은후 만주 현지의 훈련소에서 3년간 훈련을 거쳐 이민자로 심어진다.

우치하라훈련소는 신도(神道)사상을 중심으로 철저한 일본 정신, 협동정신을 가르쳤다. 만주 이민의 주창자 가토 간지가 소장을 맡아 황국정신을 가르쳤다. 의용군은 군대처럼 조직되어 농사 교육은 물론 군사교육도 실시했다. 이민의 목적이 병농일치임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인 이민자에게 분배된 토지는 원주민에게서 뺏은 토지였다. 뺏는 방법도 다양했다. 반란자의 가족을 토비(土匪)로 말아 땅을 몰수 했다. 만주에는 생계형 마적(馬賊)들이 있었지만, 점령자들은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도 토비로 몰아 생계수단을 뻿았다. 토지조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당국자는 농민을 불만자로 몰아 토지를 몰수했다.

일방적인 토지수용은 현지 농민들의 불만을 낳고 민중반란을 유발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343월 헤이룽장성 하얼빈 근처에서 일어난 이란(依蘭)사건이다. 토지수용에 반대하는 민중이 궐기해 자위군을 조직했는데, 그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 저항군은 일본의 토룡산(土龍山) 경찰서를 공격하고, 경찰관의 무장을 해제했다. 또 진압에 나선 일본군 40여명을 포위, 섬멸했다. 저항군은 나중에 항일 유격대로 발전했다.

이란 사건은 일본인 이민자들의 모집에 큰 타격을 주었다. 만주에 갔다가 현지서 죽을수 있다는 공포감이 일본 농민들 사이에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강제 토지수용을 중단하지 않았다. 1939년 만주정부와 이민을 담당하는 국영기업 만주척식회사가 확보한 이민용지는 1,068ha에 이른다. 이중 20%에 가까운 203ha는 기경지, 즉 빼앗은 토지였다. 이는 일본 국내 총경지 607ha3분의1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19378개 이민단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 이민자는 1가구당 22정보의 경지를 배분받았는데, 이중 17.1정보가 소작지였고, 나머지를 경작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인 이민정책은 만주인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지주를 양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만주국 /위키피디아
만주국 /위키피디아

 

일본은 조선인의 이민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는 선만척식회사(鮮滿拓殖會社)를 설립해 를 조선인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일본 본국과 관동군은 조선인의 이민을 원치 않았다. 조선인 이민자가 앞서 정착한 현지 조선인과 합세해 불량할 활동을 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지도 않았지만, 막지도 않았다.

 

일본인 이민은 만주에서 계급 갈등에 민족 갈등을 추가하는 결과를 빚었다. 일본 이민자들의 폭력적 행위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39년 한 일본인 이민단이 중국인들에게 노동력 제공을 강요했는데, 중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자 그 중 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살인을 한 일본인은 징역 4년의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19405월 다카하시라는 이민자가 말을 빼앗기 위해 현지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다카하시는 만주에서 어떤 일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특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민정책은 실패로 끝낫다. 모집인원은 목표에 미달했다. 19455월까지 만주로 이민을 접수한 일본인은 321,878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중 준비하다가 패전을 맞은 경우와 중도 포기자를 뺄 경우 대략 27만명이 만주로 간 것으로 추산된다. 목표 500만명에 크게 미치지 못한 수치다.

 


<참고자료>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오카베 마키오, 어문학사, 2009년 번역

마지막 황제, 에드워드 베어, 한마음사, 1988년 번역

조선총독부 만주이민정책의 이면, 조정우(한림대), 2014, 사회와역사

Wikipedia, Manchuk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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