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만큼 아름다운 내장산의 실록 지킴이 충정
단풍만큼 아름다운 내장산의 실록 지킴이 충정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15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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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굴암과 은적암에 정읍 선비 안의·손홍록이 실록 지킨 사연

 

내장산의 단풍은 끝물이었다. 단풍은 나무 아랫자락에만 붙어 있어 마지막 가을을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내장산은 단풍도 좋지만 임진왜란 때 우리 문화유산을 지킨 선조들의 노력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산은 돌산이어서 험하고 가파르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보물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다.

내장산 용굴암은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있다. 용굴암까지 철제계단을 설치해 놓았는데, 워낙 가팔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이 없던 시절에 어떻게 조선 선비들은 무거운 실록 보따리를 메고 이 절벽을 올랐을까.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은 위를 바라볼수 없고, 오직 높고 높은 하늘이 보일 뿐이라고 하는 곳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길이 다듬어져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나무꾼조차 산이 험해 다니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 전주서부터 책보따리와 임금 초상화를 신주단지 모시듯 옮겨온 것이다.

 

용굴암 /박차영
용굴암 /박차영

 

430년 전인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한달도 안 되어 한양으로 밀려오자, 태조 어진(초상화)과 왕조실록의 보관을 책임지고 있는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이 두 보물의 피신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실록은 4질을 만들어 한양의 춘추관, 충주·전주·성주 사고에 각 1부씩 분산 보관관되어 있었다.

처음엔 관청 마루 밑에 묻을 것을 검토했지만 성주하고에서 실록이 왜군에 약탈당했다는 말을 듣고 깊은 산중에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 전주사고의 실록은 배에 싣고 부안 변산에 옮기는 방법과 육로로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내장산이 적지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해 6월 왜군이 전주의 관문인 금산을 점령하자 참봉 오희길은 실록과 어진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이에 태인(泰仁)의 선비 손홍록(孫弘綠)과 안의(安義)가 집안 가솔들을 데리고 실록과 어진을 실어 날랐다. 당시 안의는 64, 손홍록은 56세의 노구였고, 두 선비 모두 관직에 있지 않았다. 두 선비는 사재를 털어 실록을 보존하는데 앞장섰다.

 

용굴암 주변의 절벽 /박차영
용굴암 주변의 절벽 /박차영

 

정읍 선비 안의, 손홍록은 전주사고의 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移安)해 일년여 동안 온전하게 지켜냈다. 두 선비는 태조 어진과 실록을 지켜내면서 일기를 썼는데, 임계기사(壬癸記事)와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 이 기록에 의하면 1592622일 실록을 내장산 은적암(隱寂庵)으로 옮기고 71일 태조어진을 용굴암으로 옮겼으며, 다시 714일 실록을 은봉암에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기고 928일 태조어진도 비래암으로 옮겼다. 실록과 태조 어진은 159379일 내장산을 떠나 정읍현으로 옮겨갈 때까지 118일 동안에 내장산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안의와 손홍록은 1년여 동안 당번을 서며(守直) 보물을 지켰다.

 

은적암 터 /박차영
은적암 터 /박차영

 

이들의 노력 끝에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이 지켜진 것이다. 두 선비의 스토리는 구전과 기록으로 전해지다가 문화재 당국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거쳐 용굴암, 은적암(은봉암), 비래암 터가 밝혀졌다.

은적음은 은봉암(隱峰庵)이라고 불린다. 용굴암에서도 한고개를 더 넘어야 한다. 가파른 적벽위에 은적암의 터가 발견되었다. 용굴암과 은적암은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손홍록과 안의의 실록 지킴이는 내장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실록과 어진은 정읍으로 돌아온 후에 1953년 진주성이 함락되자 다시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이때에도 식량과 말을 마련해 보물을 따라가 지켰다. 이에 호서검찰사 이산보가 두 사람의 공을 상신해, 안의와 손홍록은 별제(別提)에 임영되었다.

1595년 실록과 어진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때 안의는 병을 얻어 집에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1597년 실록과 어진은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져 왜란이 끝날때까지 보관되었는데, 홀로 남은 손홍록은 어진과 실록을 배행(陪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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