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가 석촌호수로 옮겨진 까닭은
삼전도비가 석촌호수로 옮겨진 까닭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16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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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종 지시로 건립, 청일전쟁 직후 수장…2010년 현재 위치로 이전

 

2009년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삼전도비를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 삼전도비는 송파구 석촌동 주택가에 있었다. 주소는 석촌동 289~3으로, 비석은 어린이공원 한쪽 구석에 보호되지 못한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 다음해인 20104월에 역사적 고증을 거쳐 이 비석은 현재의 석촌호수로 옮겨졌다.

새로 옮겼다는 삼전도비를 찾았다. 10여년 전에 보았을 때와 모습이 달라졌다. 보호각도 세워졌다. 비석의 글씨는 잘보이지 않는다. 얘전애눈 만주어가 뚜렷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 /박차영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 /박차영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에 한양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는 한강 남쪽의 나룻터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다. 인조는 더 이상 버틸수 없어 45일만에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다. 임금은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로 내려와 청나라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라고 하는 굴욕적인 항복이었다.

무엇이 굴욕인가. 인조 앞대의 임금은 명나라 군주를 황제로 모시고 예를 표했다. 사신을 보내고 조공품을 바라바리 보냈다. 세자를 책봉할 때, 왕비를 정할 때에도 명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 사대부와 조선 임금의 주장이었다. 한족 황제는 되고, 만주족 황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2류들이 갖는 알량한 자존심을 사대부 탈레반들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옮기기 이전에 삼전도비에 새겨진 부조 /박차영
옮기기 이전에 삼전도비에 새겨진 부조 /박차영

 

홍타이지는 그런 조선 임금에게서 항복을 받았다. 청 태종은 항복을 받은 곳에 기념물로 수항단’(受降壇)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황제의 명령이므로 조선은 거절할수 없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아무도 항복비에 넣을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장유·조희일에게 글을 짓게 명령했다. 이들은 마지못해 글을 지어 청나라에 보냈는데, 청은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했다.

누군가는 청나라 비위에 맞는 글을 써야 했다. 인조는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에게 글을 쓰도록 했다. 이경석은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홍타이지의 마음에 들도록 글월을 지어 바쳤고, 청 조정은 흡족해 했다. 그 글을 받아 당대 명필 오준(吳竣)이 쓰고, 전액(篆額)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써 비문이 새겨진 것이다. 이 비는 삼전도 항복 이듬해인 1639(인조 17)에 세워졌다.

청나라에겐 전승비이지만, 조선에겐 항복비였다.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있던 조선의 탈레반들에겐 이 비석이 치욕의 상징이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이경석이 삼전도비를 쓴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문화재청은 나라의 자존심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원명을 피하고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했다.

삼전도비는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한 1895(고종 32)에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 속으로 던져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해방후인 1959년 이승만 정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여 다시 매몰했다.

 

석촌호수로 옮기기 전의 삼전도비 /박차영
석촌호수로 옮기기 전의 삼전도비 /박차영

 

삼전도에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포구가 사라졌다.

개발 이전에 잠실 쪽 한강에는 토사가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다. 부리도를 중심으로 남쪽 물길과 북쪽 물길 즉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흘렀다. 19714월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함으로써 섬을 육지화하는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시작되었고,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게 되었다. 당시의 매립공사로 생겨난 땅이 현재의 잠실동과 신천동이다.

 

삼전도비는 어느해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났다. 1963년 비석은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석촌동 289-3 어린이공원 근처에 세워졌다가 2010년 원래의 위치인 석촌호수로 이전하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龜趺, 귀부)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螭首, 지붕돌)로 장식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앞면 오른쪽은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뒷면에는 한문으로 씌어 있어 17세기 만주어 및 몽골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비석 옆에 작은 크기의 받침돌 하나가 남아 있는데, 이는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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