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 한숨이 들리는 듯한 몽촌토성
백제 개로왕 한숨이 들리는 듯한 몽촌토성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1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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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왕성 형성…자연 구릉지와 개울물 활용

 

한성백제역에서 내려 몽촌토성으로 가는데 공원에서 노인네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니, 한성백제의 마지막 개로왕이 생각났다.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바둑을 잘 두는 도림(道琳)이라는 승려를 첩자로 보냈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죄를 지어 고구려를 떠났다고 속이고 바둑 한수를 가르쳐 드리겠다고 말했다. 개로왕이 그를 불러 대국을 하니, 국수였다. 임금은 그를 상객으로 모시고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도림은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성곽을 수축하고 궁궐을 수리하며, 선왕의 유골을 매장할 것을 권했다. 개로왕은 아무런 의심 없이 도림의 말을 따랐다.

삼국사기 개로왕조엔 이렇게 전한다. ”이에 임금은 백성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과 누각과 대사(臺榭)를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 지내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었다.“

 

몽촌토성 전경 /문화재청
몽촌토성 전경 /문화재청

 

삼국사기엔 개로왕이 수축한 성이 몽촌토성이라고 적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뱀처럼 이어진 성(蛇城)이라든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든지 하는 점들은 몽천토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풍납토성은 기존의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새로운 성이라는 고고학자들의 해석에서도 개로왕이 국고를 축내며 지은 성이 몽촌토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간첩의 꼬임에 빠져 몽촌토성과 그 안에 궁궐을 짓다가 국고를 비우고, 죽임을 당하고 기름진 수도를 잃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삼국사기 개로왕 21(475)에는 한성에는 북성과 남성의 두 개 성이 있었고, 그중 남성이 몽촌토성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가을 9,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병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졌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여기서 말하는 북쪽 성은 하남 위례성인 풍납토성, 남쪽 성은 몽촌토성일 가능성이 크다. 풍납토성이 왕성(王城)이라면, 몽촌토성은 왕성을 지키는 성, 또는 왕성이 함락되었을 경우에 임금이 피신하는 성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몽촌토성(夢村土城)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성의 길이가 2.7km이니, 한바퀴 걸으면 제법 운동이 된다. 가을의 끝자락에 경치도 좋다. 곱게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 해자(垓字)로 꾸려졌다는 연못, 가늘어진 가을햇살은 개로왕이 지었다는 웅장하고 화려한왕성의 모습 그대로다.

 

풍납토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을 때,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학계에 있었다. 하지만 몽촌토성이 발굴됨으로써 이런 주장이 약화되었다. 출토 유물과 내부 시설에서 몽촌토성에서 최고 지배세력이 거주했을 것으로 볼 적극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고 확인된 유물과 유적이 초기 백제의 소중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터나 관청터, 유물이 드러나지 않아 몽촌토성이 왕성이란 견해는 위축되었다.

그러면 몽촌토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여전히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하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장수왕의 공격으로 도성이 함락될 때의 남성(南城)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한성백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두 개의 왕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몽총토성도 왕성의 하나다는 것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풍납토성은 평소 왕이 거주하던 거성으로서의 정궁으로, 몽촌토성은 비상시를 염두에 둔 방어성으로 정궁에 대한 별궁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 풍납토성이 종교, 정치, 경제, 대외 교류의 중심지로서 평상시 왕이 정사를 돌보는 도시공간이었다면, 몽촌토성은 왕과 왕족들을 위한 별도의 생활 거처 및 방어 공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고 했다.

 

몽촌토성 목책 /박차영
몽촌토성 목책 /박차영

 

몽촌토성은 토성이다. 남한산성에서 뻗어내린 높이 44.8m의 자연 구릉을 이용해 낮은 곳과 끊긴 부분을 흙으로 이은 토성이다. 몽촌토성을 걷다보면 이 점을 이해할수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면을 깎아 급경사를 만들고 그 경사면에 방어용 목책을 설치했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물길인 해자를 둘렀으며, 성벽 바로 안쪽의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정도 높게 토단을 마련하여 망루로 사용했다.

성곽은 자연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으며, 마름모꼴이다. 성의 내부 면적은 216,000(136,000), 성벽 전체 길이가 2,285m에 달하는 큰 성이다.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730m, 동서로 가장 긴 곳이 540m. 또 성의 동북쪽 밖으로는 270m 가량 이어지는 외성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 건립 예정지로 확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6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었다. , , , 금속, 나무, 뼈 등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종은 백제 토기이며, 고구려 토기도 나왔다. 개로왕 이후 고구려에 의해 점령,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과 운명을 같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에서 고구려로, 나중에 신라로 넘어갔을 것이다.

토성에는 3곳의 문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3곳의 문지는 조사 당시 성벽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성내외로의 출입구로서 뿐만 아니라 성내부에 집수된 우수 등의 배수로로서의 역할도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토성 내부의 높고 낮은 구릉에는 잔디와 나무가 심어져 있다. 토성 내 구릉에서 성안은 물론 멀리 남한산, 북한산도 보인다. 옛 해자터가 지금은 넓은 호수로 변했다.

 

길을 따라 가면 1992년 문을 연 몽촌역사관에 도착한다.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유물 일부와 움집터, 저장구덩이 등을 축소 복원해 놓았다. 이런 시설들은 코로나 방역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몽촌토성 바깥에 세웠던 목책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그중 일부를 복원했다.

성 내부에는 땅을 30가량 파고 만든 움집터가 모두 12기 확인되었다. 그중 현재 원형대로 보존한 제3·4호 움집터의 전경이다. 국가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몽촌토성 이모저모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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