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뻔 한 석촌동 3호분…근초고왕 무덤인가
사라질뻔 한 석촌동 3호분…근초고왕 무덤인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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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식과 백제식의 혼합…한성백제의 위용을 드러내, 아직도 발굴중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지하엔 백제고분로라는 지하차도와 서울지하철 9호선이 층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 지상 부분에는 석촌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분이 우뚝 서 있다. 이 적석총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13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석촌동(石村洞) 고분군 입구엔 돌마리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예전에 이 곳을 돌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리는 마을()이란 고유어이고 지명 석촌동이 여기서 나왔다. 석촌동 일대는 원래 한강이 오랫동안 실어나른 흙이 쌓여 만들어낸 충적평야다. 이곳엔 돌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마을에 숱한 돌이 싸여 다섯 개 봉우리를 형성해 오봉(五峯) 마을이라고도 했다.

 

석촌동 고분군의 지도 /네이버지도
석촌동 고분군의 지도 /네이버지도

 

사연이 있었다. 백제가 초기에 송파구 일대에 나라를 세우고 석촌동을 왕들의 묘지로 삼았다. 백제 왕족이 고구려에서 이민왔기에 그들은 왕릉을 고구려식 적석총으로 쌓았고, 돌을 외부에서 반입했다. 그 무덤들이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에 산재해 있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망국의 무덤들은 방치되어 무너졌다. 왕릉 주변은 경작지가 되거나 주거지로 변해 있었다.

조선총독부 시절인 1916년에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일대에 89기의 고분이 표기되었고, 1919~1920년 실시한 정밀조사에서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에 293기 이상의 백제고분이 분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송파구는 경기도 광주군이었다. 일제도,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도 송파의 백제무덤을 발굴하지 않았다. 방치한 것이다.

 

석촌동 3호분 /박차영
석촌동 3호분 /박차영

 

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석총동 일대를 발굴조사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1,500평 남짓한 좁은 면적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지금 3호분 일대는 사적지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3호분 주변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성백제 도성의 모습 /박차영
한성백제 도성의 모습 /박차영

 

1970년대말부터 강남개발의 바람이 불었고, 1981년엔 석촌동 고분군을 지나는 도로공사가 확정되었다. 25m의 도로는 3호분과 4호분 사이를 지상으로 지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공사는 1983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1983525일 한국정신문화원의 이형구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석촌동에 현장학습을 왔다가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3호분의 기단이 잘려나가고, 남쪽 석축 상당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돌더미를 파헤쳤고, 그 바람에 한성백제 시기의 옹관과 유골도 잘려 나갔다.

이 교수는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려 고발 기사가 보도되었다. 당시 서슬퍼런 5공화국 시절이었고, 문화공보부 차관은 스리허’('(3)로 유명한 5공 실세 허문도였다. 허문도가 이 교수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허문도는 당시 무소불위였다. 그는 석촌동 고분군을 지나는 도로 공사를 지하로 변경하고, 문화재보호지역을 기존보다 10배 넓은 17,000평으로 확대했다. 지금은 비판받고 있는 군사정권이었지만 효율성만큼은 대단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석촌동 고분군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고, 발굴작업도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경향신문, ‘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백제왕릉참조)

이후 석촌동, 방이동 일대에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돌무지 무덤 7,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기 이상이 확인되었다.

 

석촌동 4호분 /박차영
석촌동 4호분 /박차영

 

석촌동 고분 가운데 단연 눈에 띠는 것은 3호분이다. 크기가 가로 50.8m, 세로 48.4m로 추정되는 사각형 계단식 돌무지 무덤이다. 산에서 가져온 큰 돌을 깨서 3단 이상 쌓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여러 채의 민가가 무덤 위에 있었기 때문에 무덤의 높이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최소 4.5m 이상인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에 상부 구조가 모두 파괴되어 3단까지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나, 한변의 길이가 30cm인 고구려 장군총이 7층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도 최소 5개층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땅을 잘 고른 후 40~50cm 두께로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에 자갈과 돌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발굴 조사를 할 때 무덤은 훼손되어 있었다. 주검이 묻힌 자리를 발견되지 못했고, 무덤 주위에 중국 동진시대의 도자기, 조각, 금으로 만든 장식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들이 나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3호분이 4~5세기의 백제 왕릉으로, 특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그 증거로 19843호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청자반구병이다. 이 유물은 중국 동진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시기는 4세기 후반이다. (경향신문,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릉인가참조)

4세기 후반의 백제왕은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그의 맏아들 근구수왕(재위 375~384), 침류왕(384~385), 진사왕(385~392), 아신왕(392~405)이다. 3호분은 석촌동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4세기 후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임금은 역시 근초고왕이다. 그는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고 고구려를 정벌해 고국원왕을 살해하며 백제의 강역을 최대로 확장했다. 역사가들이 3호분을 근초고왕의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근거들이다.

 

석촌동 5호분 /박차영
석촌동 5호분 /박차영

 

석촌동의 고분들은 고구려식과 백제식이 섞여 있다. 이는 백제의 시조 온조가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고구려를 탈출해 남하했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3호분은 무덤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다. 이에 비해 2호와 4호의 적석총(돌무지무덤)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1호분은 기단부만 남았는데,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1호분의 남쪽 무덤은 고구려식이고, 북쪽 무덤은 백제식이다.

5호분은 지름 17m, 높이 3m의 원형 봉토분인데, 흙을 다져 봉긋하게 쌓았다. 무덤을 발굴저사한 결과, 하나의 봉분 안에 여려 개의 나무널과 독널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런 양식을 즙석봉토분이라고 하는데, 고구려적 요소에 마한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특별한 시설물이 없이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 움무덤(土壙墓) 또는 구덩이식 무덤도 발굴되었다.

 

석촌동 고분군의 움무덤 /박차영
석촌동 고분군의 움무덤 /박차영

 

20155월에 석촌동 고분공원 안에서 땅꺼짐이 일어나 긴급조사를 실시한 결과, 1호분과 2호분 사이 지하에서 대형 연접 돌무지무덤(連接積石塚)이 확인되었다.

이 적석총은 사각의 적석 단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가장 큰 북쪽의 적석 단위에서 시작해 동, , 남쪽으로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10개 이상의 적석 단위가 연접된 구조다. 이런 연접분은 마한의 흙무지무덤이나 고구려의 적석총에서도 확인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적석총의 전체 규모는 사방 40m가 넘는 크기로 기존의 석촌동 3호분이나 만주의 고구려 장군총과도 비교되는 초대형급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적석총은 발굴 중이다. 발굴을 마치고 복원되면 3호분과 쌍벽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석촌동 고분에서 롯데타워가 선명하게 보인다. 백제가 도읍을 정한 그곳에 100층이 넘는 초고층 마천루가 우뚝 섰으나, 역사의 반전이다.

 

롯데타워와 석총동 고분군 /박차영
롯데타워와 석총동 고분군 /박차영

 


<참고자료>

경향신문, 2016.12.2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백제공동묘지, 백제왕릉

경향신문, 2016.12.2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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