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학자에 의해 드러난 풍납토성의 비밀
한 사학자에 의해 드러난 풍납토성의 비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1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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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의 초기 왕경 발굴…위례성 위치 논란 종지부

 

199711일 설날이었다. 선문대 역사학과 학술조사팀은 풍납토성의 성벽을 측량하고 성곽의 보존실태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 대학의 이형구 교수가 서울 송파구 풍납1231-3번지 일대의 아파트 공사장 담장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형구 교수는 14년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근무하던 19835월에 학생들과 석촌동에 현장학습을 왔다가 3호선 고분이 불도져와 포클레인에 의해 파헤쳐지는 것을 보고 정부당국에 요청해 중당시킨 적이 있었다. 개발연대에 건설회사에게 문화재 전문가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다행히 석촌동에선 당초 지상에 놓으려던 도로가 지하로 바뀌어 추진되었다. 지금의 석촌동 백제고분군은 그의 노력에 의해 발굴되고 보존된 것이다.

 

이번에도 그 이형구 교수였다. 이 교수는 깜짝 놀랐다. 지하 5m 아래에 검은 토층이 깔려 있고, 그 곳에 목탄과 토기 파편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이 교수는 인부들에게 더 이상 파내는 것을 중지시키고 이튿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백제 토기 파편들이 수없이 나왔다. 마침내 백제 왕경(王京) 유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현대건설은 풍납동에 아파트를 짓기 위해 5m 이상 높이의 철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서 터를 파고 철제 빔(Beam)을 박아 놓았다. 설날이어서 현장엔 인부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설날 연휴가 끝나고 각종 기관의 시무식이 시작되던 14일 오후 이형구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에 전화를 걸어 지금 풍납토성에서 백제토기가 쏟아지는데, 공사를 막으라고 했다.

현대건설이 풍납동 현대아파트 건설공사를 착수하기 위해 터파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백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건설회사의 입장에서는 문화재가 발굴되면 일단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 공기가 몇 년 늦어지면 공사비가 엄청나게 증가한다. 높은 담을 세워 놓고 외부인 출입을 금한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문대 조사팀은 설날 연휴를 이용해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공사 현장을 훔쳐 보게 되었고, 그 즉시 공사가 중단되고 백제 왕경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건설한 하남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풍납토성 내에 재현한 백제시대의 가옥 /박차영
풍납토성 내에 재현한 백제시대의 가옥 /박차영

 

온조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해 백제를 건국했다. (기원전 18) 그로부터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빼앗긴 475년까지 493년간 하남 위례성은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라는 나라가 한반도에 존재한 678년 기간중 70% 이상의 세월동안에 이 곳은 수도였다. 이 곳을 잃고 공주와 부여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는 약화되었고, 200년도 못버티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면 하남 위례성은 어디인가.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몰라 미상(未詳)이라고 적어 놓았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고 했다. 그 직산은 현재의 충남 천안의 직산면 일대를 가리키는데, 일연은 그곳이 하남위례성이라고 판단케 하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미궁에 빠진 위례성의 위치는 그후에도 역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하남 위례성에 있다면, 하북에도 위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약용은 온조왕이 하북 위례성을 첫 도읍으로 정한 이후 재위 14년에 한강 이남의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는데, 그 위치로 지금의 하남시 춘궁리 일대로 비정했다. 고 이병도 박사를 비롯해 고대사학자들도 정약용의 관점을 지지하며 하남시 춘궁리 일대를 하남 위례성 터로 보았다. 일부에서는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보기도 했다.

 

백제가 한성 도읍을 버린 이후 위례성의 존재는 묻혀졌다. 그 위례성이 다시 표면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었다.

일제시대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휩쓸고 간 후 풍납토성 자리에서 갖가지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초두, 금귀걸이, 과대금구, 유리옥, 4등분한 원형무늬가 있는 수막새 등이 대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학자들은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풍납토성에서 유물이 드러나자, 일본인 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934년 풍납토성이 삼국사기기록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병도 박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병도는 오랫동안 국내 사학계의 원로로 군림했기에 더 이상 반론이 제기되지 않았다.

 

풍탑토성 /박차영
풍탑토성 /박차영
풍탑토성 /박차영
풍탑토성 /박차영

 

그러나 1997년 이후 현대건설의 풍납동 공사를 중단시키고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갔다.

그후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풍납토성은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남북으로 직사각형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서벽은 이미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강물의 침식으로 원형이 사라져 버렸지만 직선에 가까운 짧은 북벽과 남벽이 남아 있고 일부 현존하는 동벽은 밖으로 배가 부른 형태로 남북의 벽보다 훨씬 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강변의 평지에 세운 성벽은 나무와 판자로 틀을 만든 다음 거기에 흙을 붓고 다져서 켜켜이 쌓아올리는 이른바 판축 기법으로 쌓았다. 전체 길이 3,470m, 지하 9m쯤에 위치하는 하부 폭 40m 남짓, 높이는 대략 9~15m 안팎의 사다리꼴 단면을 띠고 있다. 성벽을 포함한 성 내부의 면적은 226,000평에 달한다. 이웃한 몽촌토성의 두 배에 가깝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시설인 해자(垓字)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규모로 보면 삼국 이전의 평지성 가운데 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만한 규모의 성채는 왕경임을 의미한다. 한 계산에 의하면 이 정도의 성벽을 쌓으려면 8톤 트럭 20만 대 분량, 150만 톤 이상의 흙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규모 노동력 동원이 소요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가진 고대국가가 이 성을 쌓았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풍납토성은 성벽의 구조와 규모만으로도 왕도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풍납토성의 발굴에서 드러난 유적과 유물은 한결같이 왕성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1,000여 평의 경당지구에서는 건물터 따위의 유적지 190여 곳, 각종 토기와 기와, 전돌, 초석을 비롯한 500상자 분량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는 몽촌토성 전체 발굴 유물과 맞먹는다. 이만큼 유물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은 그곳이 큰 도시였고, 도읍이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사라졌다.

 

풍납토성 안내지도 /송파구
풍납토성 안내지도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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