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은 아차산성
백제 개로왕,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은 아차산성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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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고구려, 신라의 성으로 손바뀜…20여개의 보루로 한강 유역 감시

 

등산객에게 아차산은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다. 강남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군사전략가의 입장에서 아차산은 강남 벌판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요충지다. 한강유역을 뺏기 위해 혈투를 벌이던 삼국시대에 아차산은 격전의 땅이었다.

 

아차산은 행정구역 상으로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 있다. 아차의 한자 표기는 '阿嵯', '峨嵯', '阿且' 등으로 혼용되는데, 삼국사기阿且’(아차)'阿旦‘(아단) 두가지로 나타난다. 고려사에서 峨嵯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휘()'’()이기 때문에 단()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우리는 영화사(永華寺)에서 산성으로 올라갔다. 불행하게도 미세먼지가 심해 한강은 흐릿하게 보였다. 첫 번째로 만난 정자가 고구려정이다. 1984년에 팔각정을 지었다가 2009년에 헐고 다시 지었는데, 아차산의 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한다. 건너편에는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과 희미하게 드러난다.

 

아차산의 고구려정 /박차영
아차산의 고구려정 /박차영

 

고구려성에서 워커힐쪽으로 능선을 타면 아차산성이 나온다. 성의 길이는 1,125m,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다. 이 산선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죽었다. 성터를 발굴조사했더니 토기류, 철기류, 철제무기들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이 곳에서 밥을 해먹고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죽은자는 아마 흙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성이었다. 저 아래가 바로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이었다. 백제가 한강을 해자로 삼아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수도를 빼앗기고 충청도 공주 땅으로 망명케 한 곳이 바로 이 아차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때(개로왕 21, 475),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병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졌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북쪽성(풍납토성)에서 버티다가 함락당하자, 남쪽성(몽촌토성)으로 피신했으나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치욕적인 장면이다. 개로왕은 한때 자신의 신하였다가 반역을 해서 고구려 앞잡이가 된 걸루와 만년이라는 자들에게 굴욕을 당한다. 그때 개로왕이 살해당한 곳이 아차성이다. 아차산성 아래 워커힐 호텔 어딘가에 개로왕이 죽었을 것이다.

 

아차산성 /박차영
아차산성 /박차영

 

아차산성은 원래 백제의 것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조(286)를 보자.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단성이 아차산성이라는데, 학계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해서 쌓은 성이다.

 

그러면 언제 이 성이 고구려에게 빼앗겼을까. 광개토왕릉비에는 영락(永樂) 6(396)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점령한 58성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도 아단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고 한다. 광개토왕이 빼앗았고, 장수왕이 이 곳을 거점으로 한성백제를 멸한 것이다.

 

이 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한번 더 나온다. 온달에 관한 스토리다. 삼국사기 별전 온달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영양왕 원년(590), 온달이 길을 떠날 때 맹세하며 말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침내 떠나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이 아단성을 놓고는 견해가 구구하다. 온달이 죽은 아단성이 아차산성이라고 비정하는 이가 있고,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설은 없다. 단양의 온달산성이 언제, 어떻게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게다가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거의 점령한 상태인데, 중류 지역인 단양에서 신라군과 교전했다는 논리도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단양 주변에는 온달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온달이 온달산성에서 죽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어쨌든 온달이 공격한 아단성이 아차산성이라면, 그땐 신라의 성이었다.

사적 234호로 지정된 아차산성은 아차산 남쪽 붕우리에 쌓은 태뫼식 석성이며,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堡壘)를 설치해 전체적으로 포곡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길게 성을 쌓지 않고, 주요 거점에 보루를 설치해 전략적으로 대응한 방어형 산성이다. 성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는데 온달샘이라고 한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박차영
아차산 일대 보루군 /박차영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까지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고 했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가 세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20여개나 된다고 한다. 보루는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만든 요새다. 산성이 병사들이 거주하며 지킨 기지라면, 보루는 교통로 확보, 경계와 감시를 주로한 초소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보루들은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장수왕 63)에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아차산 보루군은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한강 남쪽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의 보루는 북쪽으로 수락산에가지 이른다. 수락산 보루에서는 임진강 유역에서 양주분지, 중랑천, 한강유역까지를 감시하기 적당하다. 망우산 보루는 의정부까지 관착이 가능하고, 용마산 보루는 중랑처 일대를 방어하기 적합하며, 아차산 보루는 왕숙천변을 방어하기 유리하다. 구의동과 자양동에도 보류가 있었다고 한다. 한강변 평지를 조망하기 위한 초소였을 것이다.

 

아차산 아래 한강변에는 워커힐 호텔이 있다. 호텔의 이름은 미 8군 초대사령관이었던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을 기념해 지어졌다. 워커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1223일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에 도봉구 일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순직했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호텔이 아차산 아래에 위치한 것도 무언가를 시사하는 것 같다.

 

아차산 1보루 /박차영
아차산 1보루 /박차영
아차산 5보루 /박차영
아차산 5보루 /박차영
아차산 3보루 /박차영
아차산 3보루 /박차영
아차산 4보루 /박차영
아차산 4보루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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