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남아 있는 우암 송시열의 흔적들
서울에 남아 있는 우암 송시열의 흔적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21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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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의 송시열 집터, 서울과학고의 각자 등

 

조선시대 유학자 가운데 송시열(宋時烈, 1607~1689)만큼 선호도가 뚜렷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우두머리였던 노론 사람들은 그를 공자와 맹자와 대등한 반열로 보아 송자(宋子)라 부르며 추앙한 반면에 반대당파인 남인들은 아랫사람 대하듯 시열이라고 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등장하는 유명인이다. 그는 효종과 현종의 스승으로 권세가 하늘을 찔렀고, 82세의 노구에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아 비참하게 세상을 마친, 극과 극을 달린 인물이다.

고향이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인조 11(1633) 사마시에 장원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청 황제에 항복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는 효종이 즉위해 부르자, 조정에 복귀했다.

 

우암 송시열 집터의 각자 ‘曾朱壁立’ /박차영
우암 송시열 집터의 각자 ‘曾朱壁立’ /박차영

 

1649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효종에게 바쳤다.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 유일한 사람으로 보았다. 주자는 여진족 금()나라에 쫓겨 양쯔강 남쪽으로 피신한 남송 시대의 사람이다. 송시열은 조성이 청에 당한 굴욕을 송()나라가 금에 당한 굴욕과 비교했다. 그는 남송이 주자를 받들어 중화의 문명을 유지했듯이 조선도 주자학을 받들어 여진 오랭캐 청에 저항해야 한다며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했다.

비석에 새겨진 ‘尤菴舊基’ /박차영
비석에 새겨진 ‘尤菴舊基’ /박차영

송시열은 정계에 은퇴한 후 충북 괴산군에 은거하면서 그곳을 화양동(華陽洞)이라고 이름지었다. ‘중국의 태양이 비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실제, 송시열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하게 명나라 의복과 의식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 끝까지 청의 연호 대신에 명의 연호를 썼다.

그와 그를 따르는 노론은 비록 명나라가 망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명나라를 섬기면서 이적(夷狄) 청나라에 저항하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명나라가 망했으니, 조선이 중화라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 뿌리깊은 사대주의는 척화사상으로 이어져 조선말 서양문화를 배척하게 된다.

 

송시열의 한양 집터가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다. 주소는 명륜12-22, 2-23, 5-99이다. 권세가 있는 대신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후 세 개의 필지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 15-99에는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연립주택의 기초로 활용된 담벼락 바위에는 0주벽립’(曾朱壁立)이란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는데, 송시열이 쓴 글씨다.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이 우뚝 섰다는 의미다. 유교의 성현인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송시열의 의지를 새긴 것이다.

집터엔 우암구기(尤菴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이 함께 남아 있다. 198475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공식명칭은 우암 송시열 집터.

당대에 이 동네를 송시열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송동(宋洞)이라고 했다. 이 곳은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들이 많아 봄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한다.

 

근처에는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과 영반(詠磐: 올라 앉아 시를 읊는 바위)라는 송시열의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남아 있다. 있다. 이곳을 방문하려 했는데, 코로나 방역으로 외부인의 입장을 금지한다는 학교측의 설명을 들어가지 못했다.

 
서울과학고 교정에 새겨진 ‘今古一般’ /서울시 블로그
서울과학고 교정에 새겨진 ‘今古一般’ /서울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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