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①…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
중일전쟁①…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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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방적인 루거우차오 도발…장제스 정권의 항일 결의로 확전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완핑(宛平)이란 한적한 마을이 있다. 그곳은 금()나라 시절인 1189년에 세워진 루거우차오(盧溝橋)란 다리로 유명하다. 이 다리는 홍수로 떠내려 갔다가 1698년에 청 강희제의 명으로 북구되었는데,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중 하나라고 극찬하면서 서양인들에겐 마르코 폴로 다리’(Marco Polo Bridge)로 알려져 있다.

완핑에는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체결된 조약에 의해 일본군이 주둔했다. 일본주둔군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수시로 훈련을 벌였다. 19377월초 일본군이 훈련을 실시했는데,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 일본 주둔군은 중국인이 그 병사를 납치하거나 죽였다고 주장하며 완핑에 들어가 수색하겠다고 통보했다.

베이징 일대는 당시 쑹저위안(宋哲元) 장군의 관할지역이었다. 쑹저위안은 서북군벌 펑위샹(馮玉祥)의 휘하에서 성장해 장제스의 북벌에도 참여했으며, 북벌 성공후 반장제스 연합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장제스에게 그는 내 사람이 아니었다. 쑹저위안도 장제스와 일본군 사이에 줄타기를 하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동안 일본군이 수색을 요구하면 중국측은 들어주기 일쑤였다. 일본군이 마음 놓고 중국인 마을에 들어가 뒤지고 행패를 부렸다. 중국은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해 웬만하면 일본군의 못된 짓을 눈감아 주었다.

 

루거우차오 /위키피디아
루거우차오 /위키피디아

 

그런데 19377월초엔 분위기가 달랐다. 일본측의 수색 요구를 쑹저위안의 군대가 거절했다. 일본군은 가만 있지 않았다.

77일 저녁, 일본주둔군은 중국군에 총격을 가했다. 중국군도 응사하면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루거우차우 사건,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77사건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8년을 끈 중일전쟁의 단초였고, 유럽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포함한 2차 세계대전의 기점을 형성했다.

처음엔 이 소규모 전투가 전면전 또는 장기전의 불씨가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914년 사라예보 총격사건이 1차 대전으로 확전된 것처럼, 루거우차우 사건은 중국과 일본이 사활을 걸고 싸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늙은 제국과 신흥제국의 전쟁은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집어삼킨 이래 몽골지역, 화북(華北)지역을 넘보고 있었고, 중국에선 반일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상대가 먼저 치길 기다리던 시기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 베이핑은 옛 수도였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난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베이징(北京)이 베이핑(北平)으로 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의 관동군은 만주를 집어삼키고 이듬해인 1932년말, 러허(熱河)를 침공했다. 관동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지역으로 남하했다. 이에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다급하게 협상에 응해 만리장성과 베이핑, 톈진 사이를 비무장지대로 하고 19335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베이핑은 중국군의 최전방이 되었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휴전으로 숨을 돌린 시기에 국내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공세에 밀려 대장정에 나서 산시성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장제스의 계획은 공산당을 먼저 뿌리 뽑은 후에 왜적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산군의 저항이 끈질긴데다 그 틈에 일본이 빠르게 남하를 시도했다. 국공내전이 치열한 가운데 중국에선 반일운동이 격화되고, 이에 고무된 장쉐량(張學良)19361212일 장제스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제스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중재를 받아들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를 모색하고 항일전쟁에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협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장제스의 결단을 촉구했다. 공산당과의 협상을 깨고, 일본과 평화협상을 벌일 것인가, 공산당과 휴전하고 일본과 싸울 것인가. 장제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1937년 중국의 완핑 요새를 포격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1937년 중국의 완핑 요새를 포격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일본 군부는 젊은 장교를 중심으로 한 황도파(皇道派)와 나이 든 지휘관을 중심으로 한 통제파(統制派)로 나누어져 권력투쟁을 벌였다. 두 파벌은 강온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천황을 중심으로 군대를 강화하자는데 일치된 의견을 가졌다.

19362월 대장상이 군대 예산을 삭감하자 소장파 장교와 병사 1,400여명이 도쿄 중심부에 잇는 국회의사당, 경찰청, 육군성, 해군성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인들이 정치인을 살해하며 난동을 부리자, 친정부군이 나서 반란군을 포위했다. 일촉 즉발의 내전 위기에서 천황이 젊은 군인들에게 복귀를 명령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반란자 가운데 13명의 소장파 장교들에 대한 사형선고가 집행되었다. 사건은 수습되었지만 이후 군부 출신이 내각에 들어가고 군부의 요구가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지만, 중국은 국제적 도움을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유럽에선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1922년 로마 진군에 성공해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한데 이어 1933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재무장을 수수방관했다. 1차 대전이 종전한지 20년이 되는 시기에 염전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다. 1929년 시작한 세계대공황은 미국은 물론 유럽을 강타했고, 공황의 늪에 빠진 각국의 경제는 나아질 듯 싶더니 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뉴딜 정책이고 뭐고 통하지 않았다. 유럽이든 미국이든 어느 나라도 제코가 석자,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여력이 없었다.

장제스는 국내에서도 군부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티베트와 신장 지역은 영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있었고, 화북, 광둥, 쓰촨, 산시(山西)의 군대는 장제스에 겉으로만 복종하는 독자적인 군벌의 지휘 아래 있었다. 옌안에는 공산세력이 해방구를 형성, 별도의 정부를 꾸려갔다. ‘하나의 중국’(One China)은 먼 훗날의 얘기고, 장제스는 여러 개의 중국’, ‘분열된 중국을 지휘하고 있었다.

 

완핑 요새에서 일본군의 포격에 희생된 중국인 추모비 /위키피디아
완핑 요새에서 일본군의 포격에 희생된 중국인 추모비 /위키피디아

 

루거우차오 총격전이 터졌을 때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廬山)의 구링(牯岭) 휴양지에 있었다. 그는 국민당 수뇌부를 그곳으로 소집했다. 그들이 모일 때까지 장제스는 일본의 도전에 어떤 전략을 취할지를 고민했다. 한번더 일본과 평화회다을 할 것인가, 이번에 승부수를 띄울 것인가.

717, 루산 구링에서 열린 국민당 지도부 회의에서 장제스는 전인민의 생명을 걸고 투쟁하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했다. 국민당 지도부는 장제스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공산당과 여러 정당도 일제히 국민당의 결단을 지지했다.

일본은 당초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협상을 벌일 구상을 하고 있었다. 국민당이 이번에도 협상에 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이 음모한 것과 달리 전개되었다. 중국 정부가 타협은 없다, 한판 붙자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일본은 또다시 도발을 했다. 선전포고도 없었다. 726, 일본의 관동군은 기습공격에 나서 베이핑을 공격했다. 텐진도 마찬가지였다. 베이핑은 오랫 동안 중국의 수도였다. 수도를 잃는 것은 중국인의 자손심을 잃는 것이었다. 게다가 베이핑은 우한, 광저우, 난징, 상하이를 연결하는 철도의 중심지였다. 그곳엔 역사적 유산도 많았다. 장제스는 쑹저위안에게 베이핑이 끔찍하게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관동군이 동원한 병력은 9만명, 몽골의 친일본 세력이 6만명을 보탰다. 베이징은 일본군의 작전 개시 이틀후인 928일에, 톈진은 30일에 각각 함락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Second Sino-Japanese War

Wikipedia, Marco Polo Bridge Incident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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