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②…악마의 만행, 난징 대학살
중일전쟁②…악마의 만행, 난징 대학살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1.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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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난징에서 최대 30만명 민간인 살해…아시아판 홀로코스트

 

1937726일 일본군이 중북지역에 총공세에 나선지 이틀만에 베이핑을 점령하고, 또 이틀후에 텐진을 차지했다. 4일만에 중국 북부의 주요도시 2개를 차지한 후 일본은 중국이 평화를 제의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은 우월한 입장에서 협상을 리드하다가 만주국처럼 화북지역에 괴뢰정권을 수립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본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베이핑(옛 베이징)과 텐진은 어차피 군벌 쑹저위안(宋哲元)의 영토였기에 큰 미련은 없었다. 장제스는 이제 자신의 부대가 장악한 영토에서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을 했다.

이때 장제스로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87일 일본군 중위 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가 일등병 1명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상하이 홍차오(虹桥) 공항에 진입을 시도하던 중 중국군의 검문을 받았다. 상하이는 당시 미국·영국이 관할하는 국제조계와 프랑스조계, 중국 관할지역으로 3분할되어 있었다. 홍차오 공항은 중국군 관할지역이었다. 일본군 장교는 검문에 불응하고 중국군 초병을 사살했다. 중국군이 응사해 일본군 장교와 사병은 사살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나가라고 주장했다. 국제법에도 없는 요구를 한 것이다. 조계에 참여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1932년 상하이사변을 떠올리며 일본 편에 섰다. 제국주의는 초록이 동색이었다. 이에 비해 상하이에 사는 중국인들은 자국군의 주둔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상하이에 전운이 고조되었다. 일본은 랴오둥과 텐진에 주둔하던 해군을 남하시켜 병력 8,000명을 상하이 인근 해변에 내려 놓았다. 장제스는 독일인 폰 팔켄하우젠 장군이 훈련시킨 최정예 87사단과 88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했다. 819일 장제스는 자신의 부대에 적들을 바다로 몰아내고, 해안선을 봉쇄해 왜적의 상륙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상하이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중국 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국제조계 또는 프랑스조계로 밀려들었다. 제국주의에 빼앗긴 땅이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대피하기 좋은 곳이 조차지였다. 2곳의 조차지에는 수만명의 중국인들이 필수품만 소지한채 몰려들었다.

상하이는 야산이 거의 없는 평지이기 때문에 방어시설이 미비했다. 전투는 일본군에 유리했다. 일본 폭격기는 타깃을 정확하게 맞추며 폭탄을 투하했고, 장애물이 없어 탱크 이동이 수월했다. 장제스의 최정예부대가 방어에 투입된데 이어 군벌들도 적극적으로 군대를 보냈다. 광둥 군벌 쉐웨(薛岳), 쓰촨 군벌 류샹(劉湘)은 아낌없이 자신의 최고 부대를 장제스 직계 장군의 휘하에 파병했다. 덕분에 일본군을 3개월이나 상하이에 묶어둘수 있었다.

이 때 중국을 유일하게 도와준 나라가 소련이었다. 81일 주중 소련대사 드미트리 보고몰로프는 국민당 정부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소련은 일본을 의식해 겉으로 불가침조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원조가 포함되었다. 이후 소련은 1938년까지 25,000만 달러 상당의 군수품과 항공기 300대를 공급했다. 원조 공산국가가 반공주의자 장제스를 도운 것은 중국이 일본의 팽창을 저지해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1937년 8월 28일 일본군 폭격기가 상하이를 폭격한 후 한 어린아이가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1937년 8월 28일 일본군 폭격기가 상하이를 폭격한 후 한 어린아이가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10월말이 되면서 중국군은 상하이 방어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데다 우월한 무기로 무차별 포격을 자행하는 것을 중국군이 방어하기에 벅찼다. 일본은 상하이 전투에 12만명을 파견했다.

11월초 장제스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상하이를 사수할 것인지, 병력을 보존한채 대피할 것인지의 기로에서 그는 철수를 선택했다. 일부 부대는 궤멸되고 있었다. 118일 그는 상하이 외곽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상하이는 수도 난징(南京)의 관문이다. 상하이 함락은 수도가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제스는 내륙에서 항전을 지속할 것을 결심한다. 임시수도를 충칭(重慶)으로 옮기고 우한(武漢)에 사령부를 두어 자신이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진입 /위키피디아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진입 /위키피디아

 

11월말 정부가 이사준비를 하자 상하이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 대운하를 따라 가는 방법,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 등 모둔 수단이 동원되었다. 당시 피난민이었던 양()부인은 일기장에 강기슭에 시체가 즐비하고, 강 위엔 죽은 아기들, 폭격당한 배들이 여기저기 참몰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썼다. 피난민들은 국민당 군대를 따라 우한으로 갔고, 다른 일부는 충칭으로 옮겼다.

12월초에 상하이가 함락되었다. 이제 난징에서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난징을 방어할 장군은 탕셩즈(唐生智)였다. 그는 후난성 군벌로 장제스와 손잡고 북벌에 나섰으나, 이내 장제스와 정적관계로 변했다. 그는 북벌이 끝난 1929년에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해 홍콩으로 쫓겨났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정적들을 포용하면서 그는 난징정부에 합류했다. 그가 난징 방어를 맡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며 결사항전을 다졌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의 뒷받침을 받은 일본군이 밀려들면서 110만명에 이르던 난징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피난에 나선 사람은 그나마 악마의 만행을 피할수 있었다.

탕셩즈 휘하 15만 명의 중국군은 시민들과 함께 난징성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1210,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양쯔강을 피로 물들이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탕성즈는 무능하고 비겁했다. 1213, 일본군은 난징성 안으로 진격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탕셩즈는 휘하 부대와 고립된 시민들을 버리고 양쯔강을 건너 도망쳤다.

 

난징 대학살 /위키피디아
난징 대학살 /위키피디아

 

피난을 가지도 못하고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의 희생물이 되었다. 끔찍했다. 인류역사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인간이 인간을 살육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 사령관의 이름은 기억해 두자. 그의 이름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였다.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19371213일 일본군은 마침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이날부터 6주간 일본군은 중국인을 학살했다. 워낙 많이 죽어서 정확한 피해자 숫자도 파악되지 않는다. 많게는 30만명이 살해되었다고 추정된다. 학살은 이듬해 초까지 진행되었다. 생체실험도 진행되었다. 난징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난징학살의 처참한 장면은 여러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일본 군인들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해 닥치는 대로 성 외곽과 양쯔강으로 끌고가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을 한꺼번에 살해했다.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었다.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사냥이었다.

전쟁에서 여자들의 피해는 말할수 없이 끔찍하다. 난징학살에서는 더 했다.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았다.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1946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15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학살 당시 8개 구호단체들에서 수습해 매장했다고 보고한 시신의 숫자는 약 198,000여구에 이른다. 여기에 강에 던져지거나 매장되어 발견되지 않은 시신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30만 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Battle of Shanghai

Wikipedia, Nanjing Massacre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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