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③…타이얼좡, ‘일본 불패의 신화’ 깨다
중일전쟁③…타이얼좡, ‘일본 불패의 신화’ 깨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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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본군 최초의 패전, 중국군 사기 고양…전쟁 장기화의 계기

 

19377월 이후 6개월간 중화민국 군대는 일본군에 연전연패했다. 7월말 일본군은 총공세 4일만에 베이핑(옛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하고, 4개월만에 중국 경제의 중심지 상하이를 손에 넣었다. 곧이어 12월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중국인에게 일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악귀와 같은 존재였다. 일본군은 천하무적이고, 불패의 신화를 창조했다. 일본군의 잔혹성은 수백년전 몽골 기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왜적의 남하 속도는 북로(北虜)의 그것보다 빨랐다.

 

난징대학살에 대해 일본군이 도쿄에 보고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일본 극우파가 난징 사건을 중국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도쿄 정부는 난징 점령 이후 힘을 축적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새로 점령한 영토를 안정화하고 병력을 강화하는데 1년 정도 걸린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한다. 일본 수뇌부도 중국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결정적인 공세를 1939년까지 연기한다고 내부적 방침을 세웠다.

독일이 중재에 나섰다. 이 무렵 독일엔 나치 정권이 들어섰으나, 장제스가 일찍이 독일 장교를 고문을 받아들이며 독일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중국주재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Oskar Trautmann)이 평화안을 들고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총리와 장제스 사이를 오갔다.

트라우트만 중재안은 상하이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진 1937115일 중국정부에 제시되었다. 이 중재안에 일본군부 강경파들이 미온적이라며 비판했다. 일본정부는 보다 강화된 2차 중재인을 만들어 1222일에 제시했다. 일본은 강화된 중재안을 193715일까지 대답하라고 압박했다. 중재안은 중국에 가혹했고 굴욕적이었다. 골자는 중국이 일본에 배상금을 물고 화북과 내몽골을 분리하고, 만주국을 인정하며 일본에 적대적인 정책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15일이 지나도록 중재안 수락여부를 대답하지 않았다. 거절한다는 의미였다. 1938111일 일본 정부는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어 72시간 내에 요구를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제스는 이번 요구도 묵살했다.

116일 일본의 고노에 총리는 성명을 내고 지금부터 제국정부는 국민정부를 절대로 상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고노에 성명은 아에테니세즈(相手にせず, 상대하지 않는다) 성명이라고도 불렸다. 총리대신의 성명은 뒤늦은 선전포고였다. 장제스에게 항복문서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게 선전포고의 이유였다. 장제스는 그때까지 도쿄에 주재하던 주일대사 슈시잉(許世英)을 소환하고 대결 자세를 강화했다. 중국 주둔 관동군은 서서히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1938년초, 중화민국은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고, 장제스는 군사령부를 둔 우한에서 항전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중국의 해군과 공군은 6개월의 전투에서 궤멸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몸으로 때우는 육군 밖에 없었다. 증국군의 화력이나 무기는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다. 일본군은 북쪽에서 베이핑과 텐진, 남쪽에 상하이와 난징을 차지하고 중간지대를 협공하는 형태였다. 일본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집게처럼 남과 북으로 베이핑과 난징의 중간지역을 조여갔다.

베이징과 난징 사이 전략적 요충지는 장쑤성 북부 쉬저우(徐州). 쉬저우는 대운하가 지나가는 길목으로, 당나라 이후 도시로 번창했다. 또 중국 동서를 잇는 롱하이(隴海) 철도와 베이징에서 난징 외곽 푸커우(浦口)를 연결하는 진푸(津浦)철도의 교차점이었다.

19381월말 장제스는 쉬저우를 방어의 최우선 지역으로 판단하고 주변의 군대를 집결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육상의 수로와 철도의 요지를 반드시 사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도 쉬저우를 공격목표로 삼았다.

 

타이얼좡 전투 /위키피디아
타이얼좡 전투 /위키피디아

 

중국군이 방어지로 선택한 곳은 쉬저우와 경계해 있는 산둥성 타이얼좡(臺兒莊)이란 소도시였다. 타이얼좡은 대운하 동쪽에 위치해 명청 시대에 유명한 상업중심지였다. 오가는 상인행렬, 을어선 상선, 십리밖에서도 들려오는 노랫소리로 늦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번화했다고 한다.

이 곳을 지키는 장군은 리쭝런(李宗仁)으로 광시 군벌의 대표주자였다. 리쭝런은 1925년 일찍이 국민당에 입당해 쑨원에 협력하고, 장제스의 북벌에 동참했지만, 늘상 장제스의 경쟁자였다. 1929년 반장제스 연합을 주도하며 저항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입장을 바꿔 장제스와 화해했다. 그는 장제스보다 일본이 더 싫었고,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장제스는 리쭝런을 제5전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리쭝런은 장제스에게 자신의 지휘권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는 효율적으로 부대를 관리하고, 지휘관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주었다. 바이충시(白崇禧), 탕언보(湯恩伯) 등 광시파 군벌들이 모두 그의 휘하로 모여 들었다.

일본군 사령관은 관동군 소속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중장. 일본군의 병력수는 4~7만명으로 추산되고, 중국군은 10~28만명 정도. 중국군엔 탱크가 없었고, 일본군은 80여대의 탱크를 보유했다.

 

리쭝런 /위키피디아
리쭝런 /위키피디아

 

타이얼좡 전투는 324일 시작되어 47일까지 보름 정도 이어졌다. 전황은 그야말로 육박전이었다. 당시 전황이 전투에 참여한 중국의 츠펑청(池峰城) 장군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어느 작은 마을의 골목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거리와 골목, 집과 마당에서도 싸웠다. 어느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집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벽에 구멍을 냈다. 아군과 적군이 같은 벽을 뚫은 적도 있었다. 서로 수류탄을 들고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입으로 물어 뜯으며 육탄전을 벌였다. 어느 집에 적군의 소리가 들리면 지붕에 올라가 수류탄을 던져 그들 모두 죽였다.”

건물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자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폭탄을 연결해 띠를 만들어 허리에 둘러매고 적의 탱크로 뛰어 들었다. 어느 부대는 57명 가운데 10명이 살아남았다.

일본 폭격기가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다가 중국군의 사격에 격추되기도 했다. 중국군은 다른 비행가기 조종사를 구하러 오기 전에 그 비행기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최루가스를 사용했다. 방독면이 나오기 전이라 중국군은 눈물을 흘리고 재치기를 하며 싸워야 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탱크에 뛰어든 중국군 자살특공대. /위키피디아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탱크에 뛰어든 중국군 자살특공대. /위키피디아

 

47일 일본군은 수천명의 시체를 남긴채 달아났다. 중국군 진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중국군은 일본군 2만명을 살해했다고 공표했다. 약간 부풀려졌겠지만 실제로 일본군 사망자가 1만명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분 탱크 30여대가 부서지고, 전투기 3대가 격추되었다.

중일전쟁 개전이래 중국군으로선 최초의 승전이었다. 일본군은 무적이라는 신호가 깨졌다. 일본군은 패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언론은 영광스런 적군 섬멸이라고 썼다. 패전만 하던 중국군의 사기가 갑자기 올라갔다. 장제스는 우한에서 지휘부를 불러 축배를 들었다. 장제스는 이번 승리를 계기로 여러 군벌들로 갈라져 있던 군부를 통합했다. 여론도 장제스를 지지했다. 우한 주재 미국 대사 넬슨 존슨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훌륭하게 승리했다. 일본군이 현대전에서 겪은 첫 번째 참패였다.”고 했다.

하지만 한번의 전투 슬리로 전쟁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중국군은 여전히 물자부족에 시달렸고, 국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힘들게 방어했던 타이얼좡과 쉬저우도 그해 5월 일본에 내주어야 했다. 다만 타이얼좡의 패전으로 일본은 1년만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초기의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전쟁은 장기화되어 갔고, 일본군은 중국 내륙에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빠지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a, Battle of Taierzhuang

Wikipeda, Trautmann mediation

Wikipeda, Li Zongren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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