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④…황하 제방을 파괴한 장제스
중일전쟁④…황하 제방을 파괴한 장제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2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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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진격 저지하기 위해 단행…수십만명 농민 사망, 이재민 발생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8년간의 긴 시간 동안에 끈질기게 일본군에 맞서 싸웠기에 중국은 인도처럼 나라를 잃지는 않았다. 공식통계로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은 130만명이 사망하고 180만명이 부상당했다. 이 큰 희생의 다수는 국민군이었다. 국민군의 희생으로 중국이 지켜진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는 종전후 정권을 공산당에 넘겨줬다. 국민당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것은 국민당이 중국인들에게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 극심한 인플레이션, 대기근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것들이 전시상황의 어쩔수 없는 결과라고 하더라도, 장제스 정권의 치명적인 과오가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닌, 19386월 황하강 제방 파괴다. 이 참사로 인해 공식적으론 80만명, 비공식적으론 50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죽었다. 적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보다 수배나 되는 목숨을 자국 정부가 앗아간 것이다.

 

1938년 황하 제방 파괴후 이동하는 중국 국민군 /위키피디아
1938년 황하 제방 파괴후 이동하는 중국 국민군 /위키피디아

 

산둥성 타이얼좡에서의 승전으로 중국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할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일본에 강경파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규모 전투를 미루고 협상에 응하려던 도쿄 지도부는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자는 군부 강경파의 주장에 밀렸다. 일본군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19385월 일본군은 장쑤성 쉬저우(徐州)를 점령하고 서진했다. 다음 공격 목표는 허난성 성도 정저우(鄭州)였다. 정저우는 동서로 연결하는 룽하이(隴海)철도와 베이핑에서 우한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핑한(平漢)철도가 교차하는 도시였다. 일본군이 이 도시를 차지하면 서부와 우한이 열리게 된다. 장제스는 우한에 총사령부를 두고 정저우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5월말 일본군은 정저우에서 4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장제스는 국민군의 방어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정저우를 잃으면 곧바로 우한, 우한을 뺏기면 바로 충칭이다. 그 다음은 신쟝과 티베트다. 그곳은 중원이라고 할수 없다. 변경지역이다. 장제스 진영은 정저우를 뺏기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강박증에 사로 잡혔다. 송나라, 명나라도 이민족의 침략에 남쪽 끝자락까지 도망쳤다가 나라를 잃었다. 중화민국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장제스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이 측근인 천궈푸(陳果夫)였다. 천궈푸는 장제스에게 황하의 제방을 파괴해 정저우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수몰시킬 것을 건의했다. 일설에는 국민군 1전구 사령관이었던 청첸(程潛)이 건의했다는 견해도 있다.

누가 건의했든, 명령은 장제스가 내린 것은 분명하다. 장제스는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증언과 기록들을 종합하면 장제스의 지시로 제방을 파괴한 것은 분명하다.

일종의 환경파괴 전술이다. 강의 제방이나 둑을 파괴하는 일, 현대에서 석유생산시설을 폭파하는 일, 우물에 독을 넣는 일, 도시를 불태우는 일 등이 그런 전술의 일환이다.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적이 점령한 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이다.

댐이나 제방을 폭파할 경우, 적군만 수몰시키는 게 아니라, 자국 국민에게도 피해를 주는 게 문제다. 폭파 사실을 공개적으로 예고할 경우 적군이 진입하지 않기 때문에 비밀리에 수행해야 한다. 수물지구 국민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므로 큰 피해가 예상되는 작전이었다.

이런 위험하고 무모한 작전을 중국 최고권력자가 지시했다. 그애개 인민에 대한 동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런 지시를 내릴수 있었을까. 크게 양보해 국가의 존망이 우려되는 비상한 순간에서 어쩔수 없이 선택한 결과라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무시한 전술이 정당화할수 있을까. 장제스는 그런 일을 감행했다. 그가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 그 원죄가 여기서 시작된다.

 

66일 허난성의 카이펑(開封)이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장제스는 웨이루린(魏汝霖) 장군에게 정저우를 지나는 황하 제방을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웨이루린 장군은 그 지시가 무슨 의미인줄 알고 있었다. 황하은 중국에서 양쯔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황하의 제방이 터트리면 허난성 일대가 물에 잠기고 일본군의 진격을 멈추게 할수 있다.

중국군은 철교를 끊어 일본군의 진격을 잠깐이나마 늦추게 했지만, 일본군은 곧 복구해 밀고 왔다. 제방을 무너뜨리는 초강수를 쓰지 않으면 일본군은 곧바로 정저우에 진입할 기세였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게 군대의 논리다.

첫시도는 64일부터 6일까지 자오커우(趙口)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제방이 워낙 단단해 터널 굴착 작업이 실패했다.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그곳은 화위안커우(花園口)였다. 이 곳은 강물이 구비치며 흐르는 곳이어서 제방이 자오커우보다 약했다. 웨이루린 장군은 이 곳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적은 코앞에 다가왔다. 빨리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68일 공병대가 작업에 투입되었다. 제방폭파 임무를 부여받은 8사단 참모장이었던 슝셴위(態先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이렇게 해야 했다. 더 큰 승리를 위해 아무리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고 해도 후회해서는 안된다.”

사령부는 작전을 빨리 수행하기 위해 공연단을 보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음악을 연주했다. 작전 지휘관은 이날 자정까지 작업을 끝내면(제방을 무너뜨리면) 1인당 2,000위안을 상금으로 지급하고,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마치면 1,000위안을 주겠다며 독려했다. 상금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2,000위안을 받게 되었다. 그날 밤 화위안커우 제방에 굴착작업이 완료되었다.

 

1938년 황하 제방 파괴시 홍수 범위 /위키피디아
1938년 황하 제방 파괴시 홍수 범위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물길이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다음날 오후가 되면서 물은 엄청난 규모로 쏟아져 내려갔다. 물줄기는 중국 중부 평원을 가로지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내려갔다. 작전 부대도 목선을 타고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 나갔다.

중국 황하와 회하(淮河) 사이 평야 지대에 순식간에 물바다가 생겼다. 허난성 동부, 안후이성 중부, 장쑤성 북부지역에 수몰되었다. 물에 잠긴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쯤 되는 5를 웃돌았다. 화위안커우 제방에서 쏟아진 강물은 회하와 합류해 황하의 물길을 바꾸었다. 수천개의 마을이 잠기고 수백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미국 타임지의 특파원은 이렇게 보도했다. “강의 진로는 말할 것도 없고, 중일전쟁의 진로마저 바꾸어 놓았다. 카이펑 부근의 제방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면서 800에 걸쳐 1.5m 이상의 쓰나미가 닥쳐와 죽음을 퍼뜨렸다. 황하강 범람으로 사상자 못지 않게 질병과 기아가 심각하게 퍼졌다. 강물을 타고 내려오는 오물은 발목 높이까지 들판을 뒤엎고, 세균을 퍼트리고, 농작물들을 질식시켰다.”

 

1938년 이재민을 구호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1938년 이재민을 구호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장제스 정권은 제방 붕괴를 발표하면서 일본군의 공습 때문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당시 일본군은 무차별로 중국을 공습하고 있었다. 일본은 즉각 제방을 폭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재민 구호에 나서는 등 무마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군 고위간부, 외국대사관 등에서 국민군이 일본군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방을 터트렸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장제스의 목적은 달성되었을까. 일본군의 진격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들의 상당수가 수장되었다. 하지만 우한은 그해 10월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정저우를 통하지 않고 다른 루트를 이용해 우한에 도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패한 전략이었다.

 

제방붕괴는 농민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농작물은 유실되었고, 농경지는 물이 빠진 후에도 닐려든 토사로 못쓰게 되었다. 가옥이 떠내려 가고 공공건물이 파괴되어 이재민들이 돌아와도 살 곳이 없었다. 침수지역엔 오랫동안 정신적 피해의식에 빠져 있었는데, 후에 이 지역은 공산당의 유격 본거지가 되었다. 제방 붕괴로 인해 생긴 새 물길은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종전후인 1946년에 보수공사에 착공, 원래의 물길을 되찾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Second Sino-Japanese War

Wikipedia, 1938 Yellow River flood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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