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⑥…내몽골의 괴뢰 몽장국
중일전쟁⑥…내몽골의 괴뢰 몽장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2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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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부와 일본군 사이를 오가던 덕왕, 결국 일본 앞잡이 전락

 

청나라 황제는 몽골족의 대칸을 겸임하고 있었다. 1636년 몽골의 부족장 16명은 후금의 수도 무크덴(선양)에서 2대 홍타이지에게 몽골 칸의 옥새를 바치고 대칸으로 옹립했다. 청 제국 시절에 한족과 몽골족은 동일한 군주를 섬기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었다. 제정시대의 러시아와 핀란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계에서처럼 동군연합의 체제에서 군주가 폐위될 경우 결합한 국가가 분리하게 된다. 핀란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자 독립을 선포했고, 헝가리는 1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독립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황제가 축출되자, 몽골족에도 동일한 상황이 벌어졌다. 몽골족은 대칸에 충성할 뿐, 헌족의 공화정에 복속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군주를 세워 한족 정권에게서 독립할 충분한 명분이 생겼다.

 

191112월 외몽골에서 티베트 불교지도자인 복드 젭춘담바 후툭투(Bogd Jebtsundamba Khutuktu)를 대칸으로 추대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이나, 북양군벌인 위안스카이 모두 외몽골의 독립에 반대했다. 복드 칸은 한족 정권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해 북쪽의 러시아에 의지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외몽골은 그후 중국의 군벌체제, 러시아혁명의 복잡한 외적 변수를 거치면서 몇차례 위협을 받았지만, 러시아(후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내몽골 지도자들에게도 독립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내몽골은 군벌시대 수도인 베이징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외몽골처럼 독립을 추구하긴 어려웠다. 러시아나 후에 소련도 중국과 열강의 눈치를 보느라 내몽골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 했다. 1928년 중화민국은 부() 단위였던 러허(熱河), 차하르(察哈爾), 쑤이위안(綏遠)을 성() 단위로 승격시켜 분리했다. 내몽골 부족들의 독립 의지를 갈라놓기 위한 술책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수립하자 내몽골의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의 관동군 장교들은 만주와 몽골(滿蒙)을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19333월 관동군은 러허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4월엔 차하르성을 위협했다. 이제 내몽골도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관동군은 러허성을 만주국에 귀속시켰다.

 

데므치그돈로브(덕왕, 왼쪽)과 휘하 장군 /위키피디아
데므치그돈로브(덕왕, 왼쪽)과 휘하 장군 /위키피디아

 

내몽골에는 칭기즈칸의 후손인 데므치그돈로브(Demchugdongrub)라는 황금씨족이 있었다. 몽골부족은 전통적으로 황금씨족에서 칸을 선출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음차해 덕왕(德王)이라 불렸다. 덕왕은 정통성에서 외몽골의 복드 칸에 비해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는 외몽골과 달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고. 증화민국 내의 자치를 원했다. 내몽골의 지정학적 한계를 인정한 것일수도 있다.

위안스카이는 1913년 그에게 친왕(親王)의 지위를 부여했다. 북양정권은 1919년에 18세의 나이로 내몽골을 다스리게 했다. 내몽골은 현지인에게 맡겨 내지의 상태를 지속하겠다는 뜻이었다. 덕왕은 1924년 군벌 펑위샹이 선통제(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내자 톈진의 일본 조계지를 방문해 옛 주군을 알현하고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몽장국기 /위키피디아
몽장국기 /위키피디아

 

덕왕은 내몽골을 통합할 칸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그는 인민공화국이 된 외몽골, 소련 영토로 편입된 부라야트까지 합쳐 과거 몽골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큰 꿈을 가졌다.

만주를 잃은 후, 장제스는 1932년 덕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왕은 우한과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우호적 관계를 확인했다.

내몽골로 돌아온 덕왕은 현실적 대안으로 자치를 추진했다. 그는 각지의 부족장들을 방문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자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판첸라마 9세의 지지도 얻었다. 내몽골의 군왕들은 쿠릴타이(부족장회의)를 열어 자치 여부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자치회의가 열리기 전인 19333월 관동군은 러허성을 점령했고, 차하르를 침공했다. 내몽골에 대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726일 바이링먀오(百靈廟)에서 1차 자치회의가 열렸다.

이때 만주를 차지한 관동군이 참모 다나카 규지로를 내몽골 자치회의에 참석하도록 보냈다. 일본이 내몽골 자치에 숟가락을 얹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나카는 내몽골의 자치가 일본군의 보호 하에 이뤄지길 바란다고 제의했다. 덕왕은 일본이 국민당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다만 덕왕은 일본을 이용해 장제스에게서 자치권력을 더 보장받겠다는 생각을 했다.

덕왕은 국민정부에 자치정부의 수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조직 운영비, 건축비, 시설비 등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국민당 정부는 비용 지원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몽장국의 발행화폐 /위키피디아
몽장국의 발행화폐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일본은 체계적으로 덕왕에 접근했다. 일본은 만주국의 몽골인 장교들을 앞세워 덕왕에게 접근해 뇌물을 제공하고 무기를 팔았다. 또 내몽골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자금을 풀어 내몽골에 전신국과 각종 시설을 지어주었다. 돈이 없어 절절매는 중국의 국민정부에 비해 일본은 내몽골에 넉넉하게 돈을 풀었다. 돈은 굳었던 사람의 마음을 풀어준다. 덕왕은 일본이 베푸는 금전적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공작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19348월에 덕왕의 측근 한풍림(韓風林)이 베이핑(베이징)에서 국민군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측은 이 자가 관동군의 사주를 받아 덕왕을 유인해 일본에 투항시키려 했기에 처형했다고 주장했지만, 덕왕은 중국이 자기 부하를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에 격분했다. 이 사건 이후 덕왕은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덕왕은 국민당 정부와 합의해 만든 몽정회(몽고지방자치정무위원회)에서 탈퇴해 중국과 거리를 두었다. 다급해진 중국은 쑤이위안성 정무위원회를 설치, 보다 폭 넓은 자치권을 부여하겠다고 했으나, 덕왕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내몽골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병력수도 2만명으로 늘렸다.

 

일본의 괴뢰국 /위키피디아
일본의 괴뢰국 /위키피디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덕왕은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는 내몽골에 주둔한 중국 국민군을 쫓아내고,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세웠다.

몽골자치정부는 1939년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몽장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꿔 정식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중국에서 독립했다는 것은 일본의 괴뢰정부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몽장국은 관동군에 의해 산시성 북부(晋北)와 허베이성 북부(察南)의 한족 거주지역에 수립된 괴뢰정권을 합쳐 몽장공동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일본은 1940년 왕징웨이(汪精衛)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수립한 이후 몽강국을 왕징웨이 정권에 편입시키려 했다. 덕왕은 이를 알고 격분해 장제스와 내통하지만, 일본은 덕왕을 대체할 사람이 없어 내버려 두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덕왕은 장제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이후 국공내전에 국민정부의 편에 섰다. 하지만 내몽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궐기해 덕왕의 정권은 붕괴되었다. 내몽골 공산주의자들은 독립보다는 중국내 자치를 원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Mengjiang

Wikipedia, Demchugdongrub

나무위키, 데므치그돈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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