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⑧…공산군의 이중성
중일전쟁⑧…공산군의 이중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1.3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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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전쟁을 세력 확장 기회로 활용…장제스, 공산진영 봉쇄

 

총 한발 쏘지 못하고 만주를 내준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갈 곳이 없었다. 군벌들은 자신의 영토에 장쉐량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군대를 시안(西安)에 보내 옌안(延安)에 집결한 공산당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장쉐량은 마지못해 군대를 움직이는 척했기 때문에 토벌에 진척이 없었다. 답답한 건 장제스였다. 그는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했다가 오히려 장쉐량에 체포되고 말았다.

193612월의 시안사건은 공산당을 또한번 살려주었다. 19377월 일본이 중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합작 내용은 공산당이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받아들이고 공산당이 국민당을 향한 적화운동을 취소하며 공산당의 소비에트 전부를 해체하고, 홍군을 해체하고 국민군으로 개편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대로 따른다면 공산당 정부와 군대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만 정부를 해체하는척 했을 뿐 실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장제스도 이 위장전술을 모를리 없었다. 국민당은 일본군이 밀려오므로 당장의 국공연합을 받아들였지만, 틈만 나면 공산세력을 깨부술 생각을 했다.

 

산간닝 변구 /위키피디아
산간닝 변구 /위키피디아

 

공산당은 옌안 소비에트 정부를 산시·간쑤·닝샤의 앞글자를 따 산간닝변구(陝甘寧邊區)로 바꾸었다. 정부란 명칭만 뺐을뿐 과거와 달라진 게 없었다. 군대도 옌안의 홍군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칭하고 국민정부의 기를 내걸었지만, 지휘권은 공산당이 그대로 가졌다. 양쯔강 이남에 활약하던 유격부대는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했다.

마오쩌둥은 전쟁기간에 세 단계의 전략을 취했다. 첫 번째는 국민당과의 화해를 통해 공산당의 존재를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산당을 국민당과 대등한 지위로 발전시키며, 셋째는 공산군을 증강시키고, 해방구를 확대하는 것이다.

중일전쟁은 공산당에게 호기를 제공했다. 공산당은 국민군이 퇴각한 지역에 마음껏 들어가 활동했고, 국민정부 수도 충칭에도 사무소를 설치해 첩보활동을 했다. 가장 눈에 띠는 점은 당원수와 군대규모가 급팽창한 것이다. 19374만명이었던 당원수가 1941년에 76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원수가 증가하면서 군대수도 불어났다. 팔로군과 신사군을 합친 병력수가 1937년에 9만명이었으나, 1941년에 44만명으로 증가했다.

공산군 병력이 크게 증가한 것은 이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엇다. 국민당군에 입대할 경우 일본군의 공세를 받아 개죽음 당할수 있는데 비해, 공산군은 내륙과 산악 깊숙이 주둔해 일본군의 직접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여건도 공산군이 좋았다. 국민군에 청년을 징집당한 농가는 일손을 잃어 농사를 짓기 힘들었는데, 공산세력은 병농일치를 실시해 장정이 평상시에 농사를 짓다가 적이 침입하면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이처럼 공산당이 국민정부에 비해 좋은 조건으로 병력을 확보할수 있었던 것은 주요전투 지역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반공국가였지만, 중일전쟁에서 국민당 군대를 격퇴하는 데 주력했다. 국민군이 8년 전쟁을 이르는 동안에 진을 뺐고, 공산군이 그 틈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어쩌면 2차 대전후 중국의 공산화에 가장 기여한 나라는 일본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허베이성 만리장성에서 전투를 벌이는 팔로군 /위키피디아
허베이성 만리장성에서 전투를 벌이는 팔로군 /위키피디아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중일전쟁의 주역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국내에서 발간된 일부 중국관련 서적도 중공의 출판물을 무비판적으로 옮겨 국민당군은 일본과 야합하거나 부역했다고 서술하고 항일투쟁은 중공군이 한 것으로 적고 있다. 중공군이 수행한 유일한 전투는 바이퇀 전투(百團大戰)였고, 중일전쟁에 주요 전투는 국민군이 치렀다. 일본군은 국민정부 수도인 충칭을 거의 매일 공습해 초토화시켰지만, 옌안엔 1938~1941년에 17차례 폭격했을 뿐이다. 공습으로 죽은 사람이 옌안에선 도합 214명이었는데, 충칭에선 193943~4일 이틀간 사망자가 5,000명을 넘었다.

 

국민당기를 흔들며 전투에 참여한 중국 공산군 /위키피디아
국민당기를 흔들며 전투에 참여한 중국 공산군 /위키피디아

 

중국 공산당이 자랑하는 바이퇀 전투는 팽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팔로군이 19408월부터 12월까지 화중지방에서 일본군과 왕징웨이 군대를 공격한 전투였다. 105개 여단이 참여했다고 해서 바이퇀(百團)이란 이름이 붙었다. 팔로군은 터널과 다리, 철로를 폭파하는데 성공하고, 일본의 군수공장을 6개월 동안 중단시키기도 했다. 팔로군의 성공적 투쟁으로 점령지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공산군은 이 전투를 끝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에서 당원을 잃는 것을 우려했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 맞서면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본군이 주적인 국민당 군대를 집중 공격하길 기대했다.

마오는 항일 전쟁 시기를 기회로 활용해 공산세력을 확장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간부들에게 우리 힘의 70%는 세력을 확장하고, 20%는 국민당에 대응하고, 10%는 일본에 대항하는데 활용할 것이라고 훈계했다. 그는 전쟁을 계기로 형성된 국공 화해분위기를 힘의 축적, 세력확대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팽더화이와 같은 경경파들은 군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군의 이동을 극히 제한했다. 바이퇀전투는 중공이 항일의 선전자료로 활용되지만, 전투를 주도한 팽더화이는 고난의 길을 갔다.

팽더화이는 1959년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실각했고, 1964년 문화대혁명기에 홍위병으 공격을 받아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했다. 바이퇀 전투에서 팽더화이가 당중앙에 보고도 제대로 않았고 지시도 어겼다는 것이다.

 

신사군 지휘관들 /위키피디아
신사군 지휘관들 /위키피디아

 

서로 적대적인 두 집단의 화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11월에, 급기야 국민군이 공산당의 신사군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민당 정부가 양쯔강 이남에 있던 신사군을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했는데, 신사군이 지시를 어겼다는 것이다. 이는 합작의 약속을 위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공산측은 국민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안후이성에서 일어난 충돌로 공산군의 한쪽 날개가 국민군의 포위공격으로 궤멸되다시피 했다. 공산당은 사건후 신사군을 복구시켜 부대를 확장시키며 국민당에 보복했다. 이때도 마오쩌둥은 모른척했다. 이 시건으로 지휘관 예팅(葉挺)은 체포되고, 샹잉(項英)은 사망했는데, 모두 마오의 당내 정적이었다.

신사군 사건에도 불구하고 국공합작은 깨지지 않았다. 옌안정부는 충칭정부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아직은 국민당과 갈라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국민군도 더 이상 공산군을 장강 이북으로 몰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국민정부는 일본군 공세에 충칭으로 수도를 옮긴 연후에도 공산 지역의 봉쇄를 늦추지 않았다. 장제스는 전쟁이 끝나면 공산당을 포위공격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민군의 포위에도 공산당은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변구(邊區)를 확대해 나갔다. 사실상 소비에트 정부였다. 공산당이 장악한 변구는 모두 농촌지역이었다. 마오쩌둥의 이론대로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자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산시성과 허베이성 경계지역에 진차지 변구, 산시성 서북쪽에 진쑤이 변구, 산시성 동남쪽 타이항산에 진지루위 변구를 각각 설치했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반공주의자였지만, 그도 국공합작의 틀에서 공산당과 일시적 동맹을 허용했다.

중일전쟁 기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화해했지만 언젠가 전쟁이 끝날 때를 대비하며 세력확장에 골몰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Eighth Route Army

Wikipedia ,New Fourth Army incident

Wikipedia, Hundred Regiments Offensive

Wikipedia, Shaan-Gan-Ning Border Region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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