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의 여자 해적왕 정일수
남중국해의 여자 해적왕 정일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3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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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같은 인생…淸 황제와 협상해 평안하게 일생 마쳐

 

19세기초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여자 해적왕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를 능가하는 해적이 없었다고 하니, 세계 최대의 해적왕인 셈이다.

이름하여 정일수(鄭一嫂), 또는 정씨(鄭氏). 정일수라는 이름도 남편 정을(鄭乙) 또는 정일(鄭一)의 부인()이라는 뜻이다. 호칭이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다. 영문 표기로는 칭 시(Ching Shih)이며, 서양에선 마담 칭(Madame Ching)’으로 알려져 있다.

1775년에 태어나 184469세의 나이로 부유하고 평안하게 죽었으니, 해피엔딩이다.

이 여걸의 인생은 기구하기도 하지만, 도박과도 같다.

그가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태어난 곳은 중국 광둥(廣東). 종족은 중국 광동성과 베트남 북부에서 바닷일을 하는 소수민족인 단(Dan)족 출신이라고 한다.

 

정일수 초상화 /위키피디아
정일수 초상화 /위키피디아

 

첫 번째 도박, 해적왕의 재산 절반을 내놓으라 요구하다

그는 어려서 광동성에서 창녀촌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801년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해적왕 정을의 부인이 된다. 정을의 부인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서로 눈이 맞았다는 설과 납치되어 해적의 여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녀는 예뻤다. 정일수의 초상화를 보면 젊었을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정일수는 정을의 부인이 될 때 재산 절반을 주면 결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정일수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 재산의 절반을 얻게 되었다.

정을의 선조는 대만의 건국자 정성공(鄭成功)의 부하였다고 한다. 정성공은 명나라 말에 복건성 일대의 해상을 장악하던 인물로, 청나라 군대가 밀려오자 대만을 정벌해 대항한 인물이다. 정성공이 죽은후 부하 정건이 남지나해의 정크선들을 모아 해적단을 꾸렸고, 그 후손이 몇 대를 내려와 정을로 이어졌다.

화남해도’(華南海盜)라 불리웠던 남지나해의 중국 해적들은 18세기말 베트남 농민반란세력인 떠이 썬(西山) 무리들과 연합해 왕조를 교체하는데 협력하기도 했다.

정을의 해적단 이름은 홍기방(紅旗幇)이었다. 당시 남중국해 해적들은 홍, , , , , 백의 6가지 색깔로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정을의 홍기방이 남중국해 해적 연맹의 최대의 파벌로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07년 정을이 사망했다. 정을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있다. 병사했다는 설, 폭풍으로 죽었다는 설, 베트남의 응유엔() 조와 싸우다 죽었다는 설등 다양하다.

 

전투하는 정일수 /위키피디아
전투하는 정일수 /위키피디아

 

두 번째 도박, 전남편의 양아들과 결혼해 해적선 이끌다

남편이 죽자, 정일수는 남편의 부하이자 의붓아들인 장보자(張保仔)와 재혼해 해적선단의 권력을 쥐게 된다. 장보자는 바다의 왕자였고, 전술전략이 뛰어났다. 정일수는 장보자를 손에 넣고 선단을 이끌었다.

그녀가 해적선단의 권력을 쥘 때 그의 수하에는 5만명 이상의 부하와 1,000척의 정크선이 있었다. 홍기방의 선단은 남중국해 전역을 지배하고 중국 청나라는 물론 동양으로 밀려 오고 있던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상선 및 전선보다도 막강했다.

정일수가 해적질을 하면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새 남편 장보자의 덕분이기도 하다. 남중국해를 지나가는 서양 배들을 무차별 공격해 침몰시켰으며, 서양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정일수는 엄격한 규율로 해적선을 통솔했다. 그 규율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자, 목을 베어 바다에 버린다.

약탈한 보물을 배분하기 전에 훔친자는 목을 베어 바다에 던진다.

적과 내통한 자는 목을 베어 바다에 던진다.

공물을 받은 마을과 배에서 도둑질이나 난폭한 행위를 한 자는 목을 베어 바다에 던진다.

허가 없이 육지에 오른 자는 목을 베어 바다에 던진다.

조직을 빠져나갈때는 귀를 자른다.

 

정일수의 규율중 여성 포로에 대해서는 특례 규정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여성 포로는 석방하고, 여성 포로를 강간하는 해적은 사형시킨다는 것.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을 포로로 했을 때는 선원들에게 보수로 제공하거나 혹은 선원이 살수 있도록 했다. 단 그 선원은 그 여성과 결혼해야 하며, 진정으로 아내와 같은 대우를 해야 한다. 이를 어긴자는 목을 베어 바다에 던진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규율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지켜졌다. 해적단에 포로가 됐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장교인 리처드 글래스풀(Richard Glasspoole)이 엄격한 규칙이 그들의 전투에서 용맹함으로 나타났고, 열세에 처해도 굴복하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전했다.

 

해적단 홍기방이 청나라 해군과 전투하는 모습 /중국 사이트
해적단 홍기방이 청나라 해군과 전투하는 모습 /중국 사이트

 

세번째 도박, 청나라 황제와 협상하다

정일수의 홍기방은 청나라 수군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고, 청 조정에서도 골치덩어리였다. 청나라 7대 가경제(嘉慶帝) 때의 일이다. 건륭제 이후 청은 쇠퇴기에 들어갔고, 각지에서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였다. 가경제는 영국, 포르투갈과 연합해 해적 소탕에 나섰다. 하지만 2년에 걸친 소탕작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가경제의 선택은 타협이었다. 정일수가 홍기방의 전권을 잡은지 3년만인 1810, 청나라는 목숨과 재산은 남겨둘 터이나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다. 정일수는 처음에 이 제의를 거절했지만, 청 조정과 협상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홍기방도 3년에 걸친 소탕작전에 기력이 쇠해 있었다.

조건은 해적단에게 황제의 은사를 베풀고, 지금까지 약탈한 재물은 몰수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이른바 킬러 딜(killer deal)이다. 범죄자에게 최소한의 처벌만 하는 조건으로 휴전하는 방식이다.

마침내 정일수는 심복 7,000여명을 해산하고 배와 무기를 불태우고 해적질에서 손을 털었다. 황제는 은사를 베풀었다. 7,000명중 375명만 처벌하고, 이중 126명을 사형에 처했다. 나머지는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중 일부는 청나라 수군에 들어간 자도 있으며, 정일수의 남편 정보자는 고급 장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지막, 도박 사업으로 부유하게 생을 마쳤다

정일수는 약탈한 보물들의 소유권을 얻어냈다. 일설에는 정일수가 해적에서 은퇴한후 청나라 황제로부터 작위를 얻어 귀족이 되고, 해적시절에 번 돈으로 광둥성에 도박장 및 호텔을 개업해 경영했다. 그녀는 도박사업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인생 자체가 도박이었으니까.

그녀는 장보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후 30년 이상 그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살다가 손자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소설로,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게임으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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