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⑪…4대 강국 대우받은 카이로회담
중일전쟁⑪…4대 강국 대우받은 카이로회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03 1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스벨트와 처칠, 장제스와 스탈린과 별도 회담…한국 독립, 최초 언급

 

군사지휘권을 놓고 조지프 스틸웰 장군과 장제스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정가에선 2차 대전에서 중국이 기여한 역할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과 싸워왔고, 일본군 50~60만명을 중국 내륙에 묶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고맙게 생각했다. 미국은 장제스 정권이 일본에 항복하거나 타협할 경우 저 많은 일본군이 또다른 전투, 특히 대미 전투에 투입될 것을 두려워 했다. 중국인이 더 많은 피를 흘려 주어야, 미국인이 흘리는 피의 양이 줄어든다는 전쟁 이기주의가 작동한 것이다.

1943년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미국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을 꺾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쳤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연합군은 독일과 일본을 압박해 나갔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 연합국의 승리는 분명해 졌다.

미국은 중국의 지속적인 대일 항전을 유도하기 위해 중국의 위상을 격상시키고,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확대했다.

미국은 영국 정부를 설득해 중국에 확보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했다. 영국은 1943111일 발표한 성명에서 지난 세기 동안에 맺은 불평등조약을 폐지한다고 했다. 영국이 갖고 있던 상하이 국제공동조계, 홍콩의 조차권을 돌려준다한들, 일본에 점령된 상태에서 의미가 없는 약속이었지만, 전후 중국에서 제국주의 잔재를 지워 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은 또 중국에 3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 모인 세 정상. 왼쪽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위키피디아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 모인 세 정상. 왼쪽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위키피디아

 

미국 국무부는 전후 처리 논의에서 4대 강국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미국만 결정일 뿐이고, 또다른 강국인 영국과 소련은 중국을 같은 레벨에서 상대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중국인이 태평양 섬을 뛰어다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중국은 유럽에 이권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은 미국이었다. 미군이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을 주도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과 소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장제스를 강대국 회의에 끌어들이려 했다.

장제스와 스탈린은 서로를 싫어했다. 장제스는 스탈린이 중국공산당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1941년 비밀리에 일본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해 간접적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지원한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스탈린은 장제스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피했다. 자칫 일본을 자극해 2개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4대강국 지도자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장제스와 스탈린을 떼어서 3자회담을 두 번 개최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진행된 회담이 19431122~26일의 카이로 회담과 곧이어 1128~121일에 열린 테헤란 회담이었다. 카이로엔 장제스를, 테헤란엔 스탈린을 불렀다.

 

영국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 윈스턴 처칠은 한때 발밑에 있던 중국의 지도자를 만나는데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렸다. 처칠은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편애한다고 생각하고 먼저 영미 양자 회담을 한 후에 카이로 3자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루스벨트는 처칠과 먼저 만나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에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바로 카이로로 갔다.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은 환대를 받았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장제스와 처칠은 처음으로 대면했다. 미국 웰즐리 여대를 유학해 영어를 잘하는 쑹메이링이 통역을 맡았다. 처칠은 미국이 유럽전쟁을 우선하길 기대했고, 장제스는 아시아에 적극 개입할 것을 요청했다. 카이로에서 최고의 외교관은 쑹메이링이었다. 쑹메이링은 루스벨트의 호감을 샀고, 처칠은 루스벨트의 그런 태도를 부담스러워 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3국 지도자들은 전후 아시아를 한세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는 한국과 베트남을 독립시키고, 중국에서 일본의 권리를 모두 박탈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카이로에서 중국이 4대국의 대우를 받았고, 회의에 참석한 장제스가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 전후 한반도 운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카이로 회담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또 버마 루트가 차단됨에 따라 인도 북부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험프(Hump) 공수의 회수를 증대시키고, 일본을 공중폭격하도록 중국이 공군기지를 제공하며, 미래의 연합국 조직(유엔)에서 높은 지위를 중국에 주는 문제들이 합의되었다. 이 합의는 후에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아시아 전선에 보다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을 약속했다. 장제스는 그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유럽이 첫 번째고, 태평양이 그다음, 중국은 세 번째라는 연합국의 기본 전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923년 11월말 테헤란에 모인 세정상. 왼쪽부터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루스벭트, 윈스턴 처칠 /위키피디아
1923년 11월말 테헤란에 모인 세정상. 왼쪽부터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루스벭트, 윈스턴 처칠 /위키피디아

 

카이로 회동이 끝난후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피라미드를 구경한 후 인도를 들러 귀국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곧바로 이란의 테헤란으로 건너가 스탈린과 만났다.

테헤란 회담의 주요 이슈는 유럽전장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 무렵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적극적으로 참전해야 했다. 스탈린은 이 점을 활용했다. 스탈린은 유럽전선이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작전이 시작되면 소련이 동부전선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처칠도 스탈린의 유럽 우선주의에 동조했고, 루스벨트도 공감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시아 전선을 강화할 것이라던 루스벨트의 약속은 며칠만에 뒤집어 졌다. 카이로에서 합의된 벵골만 침공계획, 버마전선의 타잔작전도 물거품이 되었다. 장제스는 영국이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영국이 빠져나간 자리에 중국군대가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유럽전쟁이 끝나면 대일전쟁에 병력을 파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전까지 중국이 홀로 일본과 지상전을 펼치라는 얘기였다.

 

이치고 작전도 /위키피디아
이치고 작전도 /위키피디아

 

해를 넘겨 1944년초,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일본의 도죠 히데키 총리는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중국을 끝장내기 위한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중국을 항복시키고, 미국과의 전투에 주력한다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를 이치고 작전(一號作戦)이라고 한다. 작전은 16444월부터 그해말까지 전개되었다.

작전의 핵심은 중국 중부에 있는 미군 비행장을 파괴하고, 철도망을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교통로를 여는 것이었다. 작전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수항한 최대의 규모였다. 중국에 주둔하는 일본군 50만명 전원이 동원되었고, 200대의 폭격기가 참여했다. 일본군은 중국 중부에서 인도차이나 국경까지 진출했다. 국민당 정부는 이 전투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Cairo Conference

Wikipedia, Tehran Conference

Wikipedia, Operation Ichi-Go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중일전쟁, 래너 미터, 2020. 금항아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