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사 안고 땅속 흐르는 서울의 만초천
슬픈 역사 안고 땅속 흐르는 서울의 만초천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2.0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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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재서 발원, 원효대교에서 한강과 만나…영천시장, 서대문공원앞 흘러

 

서울의 작은 개천들은 대부분 복개되어 이름조차 잊혀지고 있다. 그 중에 만초천(蔓草川)이라는 냇물이 있다. 인왕산 서쪽 무악재에서 발원해 서소문역사공원 앞을 지난다. 남산에서 발원한 또다른 지류가 삼각지 근처에서 합쳐져 용산 원효대교 밑에서 한강과 만난다. 지금도 복개된 밑에서 만초천이 흐르고 있다.

서대문구의 영천시장은 이 냇물을 복개한 자리에 들어서 있고, 경찰청 앞 도로 지하에도 이 냇물이 흐르고 있다.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이 일대가 침수되는데 지하의 냇물이 지상으로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만초천은 청계천과 대조를 이룬다. 만초천의 발원지는 인왕선 서쪽인데 비해 청계천은 인왕산 동쪽의 수성동이다. 청계천이 도성을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면, 만초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길이다.

 

19세기 동여도의 경조오부도에 표시된 만초천 /박차영
19세기 동여도의 경조오부도에 표시된 만초천 /박차영

 

옛날 이 냇가에 넝쿨이 무성한 만초(蔓草)가 많이 자랐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넝쿨내(덩굴내), 무악천라고도 했다.

길이는 7.7이고 유역의 폭이 매우 좁은 장방형이며 중·하류로 내려오면서 점점 넓어져 호리병 형상을 하고 있다.

만초천에는 게잡이를 했다고 한다. 밤에 게잡이를 할 때 보이는 불빛을 만천해화(蔓川蟹火)라 해서 용산팔경중의 하나였으며, 한강과 맞닿은 만초천의 끝자락은 뛰어난 경관을 자랑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만초천은 한양도성과 도성 밖을 연결하는 교통 통로이자 수운의 거점이었다. 그곳이 서소문 역사공원자리였다.

이 곳은 조선 제일의 참수장이었다. 정약용은 이곳을 곡물이 넘쳐나서 산같이 쌓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어깨가 부딪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서소문을 나와 의주로 가는 길이었으며 삼남지방(전라, 충청, 경상도)으로 가기 위해 마포, 양화로 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칠패시장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사형장을 두어 뭇 사람들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큰 모래사장은 죄인을 죽이고 그 피와 시체를 처리하기에 용이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첫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은 이곳에서 태어나 호를 만천(蔓川)이라고 했다. 조선말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103인의 성인 가운데 이곳에서 참수된 사람 44명이 포함된다. 정약용의 매형인 만초 이승훈도 이곳에서 죽었다.

 

서대문구 영천시장 /박차영
서대문구 영천시장 /박차영
서소문역사공원 현양탑 /박차영
서소문역사공원 현양탑 /박차영
용산 원효로의 만초천 하류 복개지 /박차영
용산 원효로의 만초천 하류 복개지 /박차영

 

민초천 유역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형의 변화를 겪었다. 1900년 경인선 개통과 1919년 남대문역 확장공사를 비롯해 철도교통로 공사, 용산 일대의 제방공사, 하수도 정비사업, 일본군 군사기지화 등이 진행되면서 자연곡류가 직선화되었다. 일정기엔 욱천(旭川)이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1995년에 민초천이라는 우리이름을 되찾았다.

1962년부터 복개사업이 시작되어 본류를 비롯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수 없다. 다만 남영역과 용산역 사이 고가도로 아래와 용산 미군기지 메인포스트 아래에 민초천 지류가 일부 남아 있다.

 
19세기 동여도의 경조오부도에 표시된 만초천 /박차영
19세기 동여도의 경조오부도에 표시된 만초천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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