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6·25전쟁 교차하는 행주산성
임진왜란과 6·25전쟁 교차하는 행주산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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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 시차를 두고 수도 탈환의 거점으로 역할…서울과 한강 연결하는 길목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한강변에 있는 행주산성(幸州山城)10여년만에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지하철로 갔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강매역에 내려 한시간여 걸어 창릉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을 지나 덕양산 둘레길을 주행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비탈길을 걸으면서 이 곳에서 왜군 3만명을 몰살시킨 이유를 알 듯했다. 지세가 가파르고 돌을 굴리면 적병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방어가 용이한 지형이었다.

이 곳은 또한 19509월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한 연합군이 한강도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곳이다.

4세기 이상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임진왜란과 6·25 전쟁이라는 두 전쟁은 한반도 지정학의 패턴을 형성했다. 두 전쟁 모두 국제전이었다. 또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패권전쟁이었다. 게다가 두 전쟁이 그린 전선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 세월의 교차점이 행주산성에서 만난다.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수도를 뺏고 빼앗는 전략적 거점이 된 곳이다.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사진=김현민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사진=김현민

 

산성 입구엔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19509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연합 해병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 탈환작전을 벌이던 곳이다. 그리고 125m 고지인 행주산성을 탈취한다. 물론 희생자도 있었다. 그때 산화한 해병 영령을 모신 탑이다. 그들의 희생에 힘입어 9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전쟁 발발후 3일만에 서울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군은 후퇴해 낙동강을 최후방어선으로 삼아 전투를 벌였고, 915일 마침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전을 벌였다.

한미 연합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김포와 부평을 점령하고, 드디어 919일 행주산성 건너편 한강 남단에 도착해 도강작전을 벌였다. 한강 북쪽에는 북한군의 격렬하게 저항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수륙양용 장갑차(LVT)를 탄 한미 해병대는 920일 새벽에 도강에 성공했다. 한미 연합군이 이 곳을 도강한 이후 9일후 서울을 수복한다. 이 지점이 서울 탈환의 결정적 거점이 된 것이다.

 

행주산성 사적표지 /김현민
행주산성 사적표지 /김현민

 

유엔군이 한강을 도강한 시점에서 시계를 457년전으로 되돌려본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2, 광주목사 권율(權慄)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왜군 주력부대와 일전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왜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해 퇴각하고 있었다. 권율은 왜군의 퇴로에 진을 쳐서 일격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권율은 부하 장수 조경을 시켜 지형을 물색한 결과 행주산성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시대나 대만민국의 시절에도 행주산성은 파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병력의 수는 왜군이 압도적이었다. 권율이 경기도 각지에서 긁어모은 병력은 1만명이 채 모자랐고, 왜병은 3만명 정도. 13의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은 죽음을 각오하는 배수진과 군민합동 전략이었다.

수성전에서 방비 전략은 성채와 화력, 그리고 결사항전의 의지였다. 권율은 전 인력을 동원해 성책을 이중으로 만들고, 화차, 수차석포 등의 무기를 총동원했다.

적이 몰려왔다. 왜군의 수는 압도적이었지만, 악착같이 싸우는 조선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왜군은 9차례나 공격했지만, 조선군은 화포와 강궁을 쏘아대며 적을 밀어냈다.

죽음과 죽음의 맞대결은 조선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돌을 나르고, 왜군에게 던졌다는 스토리는 군과 민이 합심단결해 적을 물리친 유명한 사례로 꼽힌다.

이때 적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왜군 주력부대는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 지방으로 후퇴하게 된다.

 

행주산성 위치도 /네이버 지도
행주산성 위치도 /네이버 지도

 

행주산성의 위치는 한강변 자유로를 따라 가다보면 서울 경계선 건너 고양시 입구에 있다. 야트마한 산이다. 산의 이름은 덕양산(德陽山), 해발 124.6m.

450년의 세월 간격을 두고 이 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은 적에게 수도 서울(조선 한양)을 빼앗겼을 때 탈환하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행주산성 남쪽은 절벽으로 한강과 맞닿아 있고, 서쪽은 창릉천이라는 작은 내가 흐른다. 농성전을 벌일 경우 배수진 전략을 쳐야 하는 곳이다. 패하면 한강물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를 싸워야 한다.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서 삼국시대 토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수 있다.

행주대첩은 한산도대첩, 진주성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선조 36(1603)에 이 곳에 행주대첩비를 세웠고, 1963년에 다시 대첩비를 세웠다. 권율 장군은 이곳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권율 장군 상 /사진=김현민
권율 장군 상 /사진=김현민
현대의 행주대첩비 /사진=김현민
현대의 행주대첩비 /사진=김현민
조선시대 행주대첩비 /사진=김현민
조선시대 행주대첩비 /사진=김현민
행주치마 /사진=김현민
행주치마 /사진=김현민
권율 장군을 모신 충장사 /사진=김현민
권율 장군을 모신 충장사 /사진=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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