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共 건국②…신장-위구르의 조용한 병합
中共 건국②…신장-위구르의 조용한 병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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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족과 신장 국민당, 중공정권에 투항…반대자는 대만과 터키로 망명

 

중국 신장(新疆)은 청나라가 새로() 얻은 땅()이란 뜻으로 지은 지역명이다. 청 멸망후 이 지역의 권력자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강자에 이리저리 붙으며 준독립국의 군주처럼 행세했다. 1949년 후반, 중공이 권력을 차지할 것이 분명해지자, 신장의 권력자들은 저항하지 않고 그동안 누리던 자치권을 신정부에 반납했다. 신장은 외몽골이나 티베트, 대만과 같은 분란이 없이 조용히 중국의 영토로 복귀했다.

중공의 공식적인 역사기록물은 신장의 중공 합류를 평화적인 해방으로 표현했다. 무력충돌이 없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 과정에 혼란과 대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신장은 명나라 시절에 서역(西域)으로 불리는 곳으로, 오이라트라는 몽골족 일파의 지배 하에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 신장의 몽골족들이 준가르라는 나라로 통합되어 세력을 떨쳤는데, 옹정~건륭제가 이 부족의 항복을 받기 위해 정벌했다. 청의 침공으로 오이라트족은 대량으로 학살되거나 러시아 영토로 이주해 종족 소멸의 과정을 거쳤다. 이후 신장지역은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족이 주류 종족이 되었다.

청조는 신장을 지배하기 위해 만주족을 이동시켰는데, 그 종족이 지금 신장에 남아 있는 시버족(錫伯族)이다. 시버족은 2000년 기준으로 인구 19만명이며, 인구순으로 중국 소수민족 30번째에 해당한다. 이들은 사어(死語)가 된 만주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성스차이 /위키피디아
성스차이 /위키피디아

 

신해혁명 이후 신장에는 혁명파와 황제파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1912년 간쑤성에 주둔하던 중화민국의 양쩡신(楊增新)이 군대를 이끌고 신장성 성도 디화(迪化, 우루무치)를 점령해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했다. 양쩡신이 1928년 죽은 후에 부사령관이던 진수런(金樹仁)이 신장 지배자가 되었다. 1933년 진수런은 부하들의 쿠데타로 권력에서 쫓겨나고, 혼란한 틈을 타고 성스차이(盛世才)가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지배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성스차이는 주변 권력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는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소련에게 신장의 주요한 이권을 내주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을 전국에 내걸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 접촉해 지원을 호소했고, 중공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毛澤民) 등을 파견했다. 하지만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 소련이 수세에 몰리자 그는 공산당 숙청작업을 벌였다. 그는 소련 고문단을 축출하고 마오쩌민 등 중공의 간부들을 처형했다. 성스차이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사관을 끌어들이고 국민당 충칭 정부에 자발적으로 복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제스는 신장이 제발로 걸어들어온 것은 받아들였지만, 변절을 밥먹듯 하는 성스차이를 싫어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이 2차대전의 승기를 잡자 성스차이는 다시 소련에 붙고 중국 공산당에 화해 제스추어를 보냈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이 배신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공당도 마오의 동생을 죽인 자를 차갑게 걷어찼다. 오갈데 없는 성스차이는 국민당에 의지했는데, 노련한 장제스는 그를 신장성 독판 자리에서 해임하고 충칭 정부의 농림부장에 임명함으로써 그의 권력기반을 허물어 버렸다.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신장 권력에서 제거한 이후 한족 장군 우종신(吴忠信)을 보냈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위구르족들이 1944년 신장 서북쪽 일리(Ili, 伊寧)를 중심으로 한 3개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위구르족 봉기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얻었고, 소련은 이들을 앞세워 신장에 영형력을 행사했다. 장제스 정권은 중일전쟁 막판에 일본군에 의해 쓰촨으로 쫓겨나 신장의 혼란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위구르족은 194411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East Turkestan Republic)을 수립,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신장에 한족 인구비율은 5%에 불과했다. 신장에는 위구르족, 카차흐족 등 다양한 형태의 투르크계 종족들이 거주했다. 반란자들은 나라 이름을 위구르스탄으로 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포괄적으로 돌궐(突厥)족의 갈래라는 점을 강조, 동돌궐(동투르키스탄)이란 이름을 채택했다. 서돌궐은 터키공화국을 의미한다.

신장에선 1933~1934년에 위구르족이 봉기해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수립한 적이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1944년의 봉기를 제2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으로 분류한다.

 

동투르키스탄의 기(왼쪽)와 터키공화국의 국기(오른쪽) /위키피디아
동투르키스탄의 기(왼쪽)와 터키공화국의 국기(오른쪽) /위키피디아

 

사태가 악화되자 장제스는 장즈중(張治中)을 우루무치로 파견했다. 국민당과 일리 정부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장즈중은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3개구에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를 주고 중국에 복귀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위구르족들은 장즈중이 전임 지배자들과 달리 유화적인 제스추어를 보이자 타협을 했다. 신장성 주석은 장즈중이 맡고, 위구르 반란자인 아흐메트잔 카시미가 부주석이 되었다. 언론과 출판에서 검열이 완화되었고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위구르어와 카자흐어가 사용되었다.

신장은 국민당 정권과 위구르 정권이 어정쩡하게 연합한 형태를 유지한채 국공내전의 종착점을 맞게 되었다. 소련은 여전히 위구르 정권에 영향력을 미쳤다.

 

제2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제2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인민해방군이 중국 중원을 거의 점령해 가고 있던 1949819, 마오쩌둥은 신장 위구르 지배지역인 3개구에 전보를 보내 921일에 예정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마디로 회의에 참석해 중공정권에 복속할 것을 선언하라는 얘기였다.

822일 동투르키스탄 3구의 대표 5명은 소련이 마련해준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다가 바이칼 호 근처에서 사고가 나 전원 사망했다. 사고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나머지 대표 3명은 열차편으로 뒤늦게 베이징에 도착했다. 살아서 회의에 참석한 위구르 대표들은 동투르키스탄의 중공 복속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3명의 대표들은 정치협상회의와 101일에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에도 참석했다. 이때까지 중공 정부는 위구르 대표 5명의 사망소식을 공개하지 않았다.

중공 정부는 위구르 대표단의 사망소식을 12월에 발표하고 사망자를 인민의 영웅으로 대우하며 장례를 치러줬다. 이들의 사망 원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후 해외에서 조직된 동투르키스탄(동돌궐) 망명정부는 이때 신장-위구르의 중국 복속은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장을 첫 방문한 중공정권 요원들. /위키피디아
신장을 첫 방문한 중공정권 요원들. /위키피디아

 

신장의 국민당 잔류세력도 중공 정권에 대항하지 않았다. 장즈중 사퇴 이후 신장 주석을 맡고 있던 부르한 샤히디(Burhan Shahidi)와 한족 츨신 총사령관 타오즈웨(陶峙岳)는 공산정권에 협조하겠다고 선언했다. 한유웬(韓有文)과 같은 위그루족 군인들도 중공에 투항했다.

중공정권에 반대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사람들은 신장을 떠나 터키 또는 대만으로 망명했다. 부주석이었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터키로 망명했다. 회족 군벌이었던 마정상(馬呈祥)은 인도를 거쳐 대만으로 건너갔다. 신장에 남아있던 마수드 사브리는 공산당에 체포되어 1952년 옥사했다.

일부 저항도 있었다. 카자흐족 군벌인 오스만 바투르는 인민해방군에 저항했고, 러시아 백군 출신 율바르스 칸(Yulbars Khan)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패해 티베트로 도망쳤다가 다시 대만으로 건너갔다.

1012일 인민해방군이 신장에 진압했다. 동투르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가 되었고, 1955년부터 신장-위구르 자치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Incorporation of Xinjiang into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ikipedia, History of Xinjiang

Wikipedia, Sheng Shicai

Wikipedia, Ili Rebellion

Wikipedia, Second East Turkestan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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