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건국⑥…한국전 참전과 가오강 숙청
중공 건국⑥…한국전 참전과 가오강 숙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20 1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오쩌둥, 순망치한 논리로 참전…중국인에 애국심 고취, 군벌화 견제

 

국공내전 기간에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려고 했다. 북한은 중공군을 위해 물류이동을 지원하고 무기를 공급하며, 부상병을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 군대도 일부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 지도부의 천윈(陳雲)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19506월 한국전이 발발했다. 중공은 베이징에서 정권을 수립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동해안과 남해안에선 국민당 잔여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어 안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중공은 북한을 도울 여력도 없었거니와, 전쟁 초기에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했기 때문에 한반도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6·25 발발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내전에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은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 한반도에 유엔군을 투입하고 대만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했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면서 중공 지도부가 당황해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오랜 명분이 다시 부상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이 속담은 한반도가 적에게 넘어가면 만주가 흔들리고 중원이 위협받는다는 중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는 임진왜란 때 명군이 항일원조전쟁을 벌인 명분이 되었고, 마오쩌둥에겐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할 이유를 제공했다.

1950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베이징의 중공 지도부에 한국전 참전 여부에 대한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중공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았다.

외교부장 저우언라이, 베이징 군구사령관 예젠잉(葉劍英)은 참전을 반대했다. 항일 전쟁과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인민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주를 책임지던 동북 제4야전군 사령관 가오강(高崗)도 적극 반대했다. 그는 참전시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한반도에 투입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펑더화이(彭德懷)는 소련군의 지원이 있다면 참전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마오쩌둥의 의향을 찔러보았다. 마오의 생각은 참전이었다. 마오의 지론은 미군이 북조선군을 끝까지 추격하면 동북(만주)이 위태로워지고, 동북이 전쟁터가 되면 자산가 계급이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므로 출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생각은 결론이나 다름 없었다. 참전을 반대하던 주더(朱德)도 순망치한론을 받아둘이고 참전으로 돌아섰다.

 

얼어버린 압록강을 건너오는 중공군 /위키피디아
얼어버린 압록강을 건너오는 중공군 /위키피디아

 

108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100만 지원군을 한반도로 출격할 것을 명령했다.

마오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첫 번째 이유는 순망치한이었다. 어쩌면 신생 중공정권에 대만보다 한반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대만이 중국영토가 된 것은 정성공(鄭成功)의 정벌 이후 300년에 불과하지만, 한반도의 역대왕조는 1,500년 동안 제1의 조공국의 위치를 유지해왔다.

마오쩌둥의 그 다음 의도는 중국인들의 애국주의를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참전 구호로 내걸었다. 국민당 정권 시절에 오랫동안 중국인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미국 숭배(崇美) 사상을 제거하고, 미국에 대한 두려움(恐美)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중공은 공장을 풀가동해 대포와 총을 생산하고, 노동자들에게 애국, 반미 감정을 부추겼다.

 

가오강 /위키피디아
가오강 /위키피디아

 

마오의 또다른 목적은 만주에 웅크리고 군벌화하고 있는 가오강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한국전 지원을 빌미로 만주의 군부세력을 한반도로 빼돌려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다. 청나라가 멸명한 직후 만주 군벌 장쩌린-장쉐량이 대를 이어 세력화했던 사실을 마오는 예의주시했다.

가오강은 산시(陝西)성 출신으로, 1927년 산시성 북부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하며 공산당 서북 근거지를 창시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군대가 대장정 끝에 옌안에 도착하자 마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지칠대로 지쳐 있던 마오쩌둥에겐 가오강의 지지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가오강은 친소파였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도움을 받고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국민당과의 내전시기에 마오는 그를 필요로 했다.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자 마오는 소련에 우호적인 가오강을 보내 만주가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선수를 쳤다.

가오강은 소련을 뒷배경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2차 대전 종전후 만주는 일본이 대륙침략기지로 산업화시킨 덕분에 중국내에서 산업시설이 발달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소련군이 관동군에 빼앗은 무기도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다. 국공내전에서 가오강의 군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북3성의 제4야전군은 중국 전역의 6개 군관할지에서 최대, 최고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오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입장에선 어제의 동지가 견제세력이 된 것이다.

19498월 베이징의 중앙 정부는 만주 행정기구를 동북 인민정부로 개편하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부주석으로 승진한 가오강은 지역군벌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북지역의 관공서에는 마오의 초상화 대신에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렸다. 베이징 정부가 마오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194912월 마오가 선양에 들렀을 때 자신의 초상화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지인들에겐 동북3성이 중국 땅이 아니라 소련령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북한의 김일성이 눈치챘다. 소련의 배경으로 북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베이징 정부보다는 동북 제1서기인 가오강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마오로서도 국민당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더 이상 만주에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이 후원하는 북한의 일을 모른척 했다.

 

1950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마오쩌둥은 참전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경쟁자이자, 친소파였던 가오강의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기회로 활용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국전에 가오강이 지휘하는 제4야전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가오강에게 파병군의 총책임을 맡기지 않고, 그의 위에 팽더화이를 올려 놓았다. 가오강은 자기 휘하의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 팽더화이의 지휘에 맡기고, 자신은 병참 지원을 맡았다. 4야전군은 한국전에서 20여만명이 사망했다.

한국전이 끝날 무렵인 1952년 가오강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에 지명되면서 베이징으로 불려 들어갔다. 가오강과 동북군 근거지를 차단한 것이다.

 

중공 초기의 6개 군구 /그래픽=김현민
중공 초기의 6개 군구 /그래픽=김현민

 

한국전 종전 직후 1953, 중국 공산당 내에선 건국후 첫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만주의 지도자였던 가오강과 화동(華東)의 군정 주석이자 상하이 시장인 라오수스(饒漱石)가 연합해 소련의 경제발전제도를 받아들이자며 당 지도부의 지도체제를 비판했다.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당이 기업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 기업을 독자책임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劉少奇)등 지도부가 추진하는 집단지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군벌화한 지방 세력과 중앙지도부와의 첫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중공의 첫 정치투쟁에서 마오의 중앙당이 승리했다. 마오 세력은 가오강과 라이수스를 숙청했다. 이유는 이들이 소련과 연계해 만주 지역을 독립왕국화하려는 기도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갓 태어난 중공의 입장에선 청나라 말기에 지방이 군벌화한 것을 경계했고,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던 지역 권력을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 타깃이 가오강과 라이수스였다.

중공 초기 군대 관할구역을 여섯 개 지구로 개편했는데, 가오강이 제4야전군으로 동북지역을 장악했고, 라오수스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지역을 맡고 있었다. 두 지역이 연대하면 중국이 다시 분열될수 있다고 마오의 당 지도부는 생각한 것이다. 가오강은 1954년 체포되자 자살했고, 라오수스도 실각한후 구금되었다. 가오강의 숙청은 중국 동북지역 만주가 친소 기지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로 볼수 있다.

이 사건은 또 마오쩌둥이 중공의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의 입장에선 가오강의 막강한 군대를 한국전 전선에 투입, 약화시킨 후에 가오강을 전선에서 떼어 중앙으로 불러 들였다가 사상투쟁을 거쳐 제거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Chinese Civil War

Wikipedia, Gao Gang

Wikipedia, Korean War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