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소중한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다
임금은 소중한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12.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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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연회나 격려하는 자리에 궁중채화 제작…황을순 보유자가 전승

 

옛 왕실에서 각종 연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가화(假花)를 만들었는데, 이를 궁중채화라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중에 소속된 장인을 통해 궁중채화를 제작토록 하고, 이를 전담하여 총괄·관리하는 직책을 두고, 연회에 참석한 외빈에게 왕이 직접 꽃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019(현종 10) 강감찬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길에 친히 나아가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며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궁중채화가 국가와 왕실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채화는 연회와 같은 특별한 날에 따라 격식을 달리하며 사용되었다.

1886, 고종은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치결하고, 그 기념으로 프랑스의 사디(Sadicarnot) 대통령에게 특별한 꽃을 선물했다. 그 꽃은 두 개의 놋쇠 반() 위에 금분을 입힌 고목을 세워 얇은 나무판을 오려 물들인 측백 잎을 달고, 주위에는 옥을 깎아 만든 난초와 아기자기한 꽃장식을 둘러쳐 만든 조선의 예술품, 궁중채화였다.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작한 홍도화준 /문화재청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작한 홍도화준 /문화재청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작한 홍도화준 /문화재청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작한 홍도화준 /문화재청

 

궁중채화는 왕가에 대한 존중의 뜻을 표현하거나 평화·장수·건강 등을 상징했다. 재료는 비단에서부터 견직물, 모직물, 광물, 깃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대상으로는 과꽃, 국화, 도라지꽃, 모란, 복사꽃, 유자꽃, 연꽃, 월계꽃, 패랭이꽃 등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궁중채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직물의 정련, 염색, 매염, 다듬이질 등을 준비해야 한다.

궁중채화는 자연 그대로의 꽃을 묘사하기 위해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엄정하여 예로부터 궁중에서는 채화를 제작·관리하는 직책을 둘 정도로 위상이 각별했다.

궁중 채화는 종류에 따라 명칭이 있었다.

왕실 연회 때 어좌의 좌우를 장식하는 꽃을 준화(樽花)라고 한다. 준화(樽花)는 홍도화(紅桃花)와 벽도화(璧桃花) 한 쌍을 만들어 꽃항아리에 꽃아 왕의 좌석 앞 좌우를 장식한다.

왕실 가족에게는 상화(床花)를 올린다. 상화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꽃이 수파련(水波蓮)이다. 수파련은 왕실의 연회상에 장식되는 상화로서 연꽃 8송이가 좌우로 고루 펼쳐 장식되는 꽃이다.

이외에도 머리에 꽂는 채화를 수화(首花)라고 했다.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궁중채화 실연장면 /문화재청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궁중채화 실연장면 /문화재청

 

조선왕조의 궁중채화는 오늘날에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황을순 보유자는 인간이 손으로 빚어 만든 채화에도 일생이 있다고 했다. 보유자는 숱한 손놀림을 거쳐 한 송이의 꽃을 만들고, 그 꽃들을 격식에 맞게 나무줄기와 가지에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 작품으로 완성한다.

국립무형유산원이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의 역사와 전승 가치 등을 수록해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우선 궁중채화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다루고, 궁중채화가 삼국 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왕실 존엄의 상징물로 정립되는 과정과 특징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했다.

 

궁중채화 /문화재청
궁중채화 /문화재청
궁중채화 /문화재청
궁중채화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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