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거래은행으로 급성장한 블라이흐뢰더
비스마르크 거래은행으로 급성장한 블라이흐뢰더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2.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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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에 전쟁자금 조달, 승전 이끌어…히틀러의 반유대주의로 몰락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군대의 힘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제압한 인물이다. 그는 세 번의 전쟁을 치렀다. 1864년 덴마크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870~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이다. 그는 세 번의 전쟁을 쇠()와 피(), 즉 군사력으로 이겼다고 해서 철혈 재상으로 불린다.

하지만 전쟁은 무력만으로 이길수 없다. 그에게 쇠와 피(Blood and Iron)만큼 중요한 것은 돈(Gold)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금융인이 있었는데, 그가 게르존 블라이흐뢰더(Gerson von Bleichröder).

블리이흐뢰더는 유대인 가문이다. 적어도 호엔쫄레른가의 독일제국은 유대인에 호의적이었고, 협조관계에 있었다. 유럽 최대 은행가문인 로스차일드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했다.

 

정치에 입문한 비스마르크는 1851년 프로이센 대사로 푸랑크푸르트 연방대회에 파견되었다. 당시 독일은 통일되지 않고 여러 작은 나라와 공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그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접촉을 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도 비스마르크의 그릇을 알아보았다.

1858년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주재 대사로 발령이 났다. 대사로 가기 전에 그는 로스차일드가의 수장인 메이어 카를에게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줄 은행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메이어가 소개한 사람이 게르존 블라이흐뢰더였다.

블라이흐뢰더 가문은 게르존의 아버지 사무엘(Samuel Bleichröder)에 의해 금융업을 시작했다. 사무엘(1779~1855)1803년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은행업을 시작했는데, 프로이센 궁정의 재무를 대행했다.

사무엘은 은행을 시작하면서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와 사업관계를 맺었는데, 사실상 주종관계였다. 로스차일드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5개국에서 영업을 하는 거대 국제은행이었고, 블라이흐뢰더는 베를린에서 영업하는 로컬 은행에 불과했다.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와 적대적인 프로이센의 업무를 블라이흐뢰더에게 대행시킨 것이다.

게르존(1822~1893)은 사무엘의 장남으로 17살이던 1839년에 가문의 은행에 참여했다. 게르존은 아버지가 1855년에 사망한 이후 은행을 책임지고 경영했다. 그는 로스차일드를 상전으로 깍듯하게 모시고 로스차일드가 나눠주는 대출 배당금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게르존 폰 블라이흐뢰더 /위키피디아
게르존 폰 블라이흐뢰더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가 게르존을 비스마르크에 소개한 것은 그를 통해 베를린의 정보를 얻고 프로이센에 은행영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충돌할 경우 로스차일드의 프로이센 영업을 블리이흐뢰더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된 것은 1862년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재상이 되면서 개인재산 신탁회사였던 블라이흐뢰더를 프로이센의 주거래은행으로 지정했다. 오늘날 금융규제로 치면 이해충돌이자 내부자거래였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통했다. 영국의 금융가가 블라이흐뢰더를 믿을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비스마르크는 내 재산을 맡긴 은행인데 신뢰하지 않을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철혈 재상은 국제관계의 허를 찌르며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에 골몰했다. 첫 번째 타깃은 덴마크였다. 프로이센과 덴마크는 비스마르크가 재상이 오르기 전인 1848~52년에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치러 패배한 적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번에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였다. 그는 오스트리이에게 홀스타인을 주고,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차지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1864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덴마크를 제압하고 홀스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차지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홀스타인을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홀스타인은 오스트리아와 떨어져 있는데다, 프로이센에 포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덴마크 왕가인 프레데릭 8세를 폴스타인 공작에 옹립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프로이센이 반대했다. 프로이센은 차제에 홀스타인을 팔라고 오스트리아에 제안했다. 돈은 게르존에게 만들라고 요청한 것은 물론이다.

 

홀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철혈 재상도 무기만으로 전쟁을 승리할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프로이센 의회는 자유주의자들이 다수세력이어서 비스마르크의 전쟁 비용을 의결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게르존에게 전비 충당을 맡겼다. 게르존은 쾰른~민덴(Köln-Minden)간 철도의 정부 지분을 매각할 것을 비스마르크에 제안. 비스마르크는 게르손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부와 왕실자산을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왕실 자산인 프로이센 해상보험도 민영화하고, 철도의 정부 지분도 팔고, 공채도 매각했다. 전비는 게르존의 힘으로 마련되었고, 의회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했다. 로스차일드도 블라이흐뢰더를 통해 프로이센 공채를 매입했다.

 

1870년 9월 세당 전투에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 /위키피디아
1870년 9월 세당 전투에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에 승전한 후 4년이 지난 1870,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순식간에 파리를 점령하고, 빌헬름 1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황제로 즉위한다.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가 왜 보불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아직도 의아해 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경제력이 프로이센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전쟁에 앞서 블라이흐뢰더와 프랑스 내정에 관해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았고, 블라이흐뢰더는 로스차일드와 정보를 교환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가 이 금융채널에서 확보한 정보를 토대로 전쟁을 기획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블라이흐뢰더 가문은 유대인이었지만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의 주거래은행으로서, 국가적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871년에 베를린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를 연결하는 915 마일의 철도건설사업이 파산했는데, 블라이흐뢰더는 비스마르크의 권고로 구제금융에 참여했다. 이 일로 그는 반유대인 그룹에게서도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게르존은 18723월 유대인으로는 아브라함 오펜하임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이센 귀족이 되었다. 게르존은 뉴욕의 투자회사 란덴버그 탈만에도 투자, 파트너가 되었다.

 

블라이흐뢰더 은행은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돌풍을 견뎌내지 못했다.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인 1931, 블라이흐뢰더 은행은 후발은행인 아른홀트(Gebr. Arnhold)에 매각되었다. 아른홀트는 1864년 드레스덴에서 창업한 유대계 은행이다.

아른홀트는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인 1937년 뉴욕으로 옮겨 아놀드&블라이슈뢰더의 이름으로 투자은행 부문에서 영업을 이어갔다. 2015년 블랙스턴과 코셰어 캐피털이 이 회사의 지분을 인수해 경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Gerson von Bleichröder

Wikipedia, Samuel Bleichröder

Wikipedia, Otto von Bismarck

Wikipedia, Arnhold and S. Bleichroe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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