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①…참새 잡다 인민 죽인 대약진운동
문화혁명①…참새 잡다 인민 죽인 대약진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2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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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해운동, 토법고로 등 실패…대기근으로 수천만명의 아사자 발생

 

1950년대말에 중국에서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이란 정책이 있었다. 이 정책은 대약진운동 기간에 마오쩌둥의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마오가 어느날 참새를 보고 저 새는 해로운 새라고 지적했다. 참새가 곡식 낱알을 먹으면서 인민들에게서 노동의 결실을 도둑질한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마오쩌둥은 참새, 모기, 파리, 들쥐 등 4가지 해로운 동물을 제거하는(除四害) 운동을 벌였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전 인민이 동원되었다. 중국인들은 새를 잡는데 동원되었고, 새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냄비와 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주었다. 중국 전역에서 참새 둥지가 허물어졌고, 알은 깨졌다. 어미 참새는 총에 맞아 죽고, 새끼 참새는 둥지에서 죽였다. 참새를 많이 잡은 정부기관과 작업반에게 죽은 새의 부피를 달아 상과 표창을 주었다.

그 결과 참새가 멸종 위기에 빠졌다. 2년후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참새가 곡식만 먹는게 아니라 해충도 잡아 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새가 멸종되자, 이번엔 메뚜기 떼가 중국 전역을 뒤엎었다. 인간이 먹이사슬을 건드리니,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쌀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급락했다. 이어 3년 대기근이 촉발되고 수천만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하는 수 없이 소련에서 참새를 공수해 생태계를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

 

참새 /위키피디아
참새 /위키피디아

 

내란을 종식시키고 한국전도 끝난 1953, 중공은 본격적인 산업재건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1953년부터 1957년까지 1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했는데 의외로 성과가 좋았다. 전쟁과 내전을 오래 치르면서 무너진 경제는 빠르게 소생하는듯 싶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인민의 기대도 컸다.

마오쩌둥은 제25개년 계획(1958~1962)을 야심차게 밀어 부치면서 대약진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포했다. 19582월에 선포된 대약진운동은 강철, 전력, 석탄 생산을 대폭 늘려 15년 후(1972)에 중국을 침략했던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로 추진되었다.

 

인민공사에서 식장에서 함께 식시화는 농민들. /위키피디아
인민공사에서 식장에서 함께 식시화는 농민들. /위키피디아

 

대약진운동은 농촌집단화로 시작되었다. 초기에 중공정권은 지주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무상 배분하는 형태로 사적 소유를 인정했지만, 점차 마을 단위의 집단소유제도로 전환했다. 집단소유는 인민공사(人民公社)라는 조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인민공사는 허난성과 허베이성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공사의 초기모습을 시찰하면서 저것이야말로 공산주의 농민조직이라고 감탄했다. 중공 중앙위원회는 인민공사의 채택을 결의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58년말에는 인민공사의 수즌 전국적으로 26,000개에 이르렀고, 농민의 88%를 포괄했다.

인민공사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이나, 공삱주의 창시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마르크스도 언급한 집단농장의 형태다. 청조에서 변법자강론을 펼친 캉유웨이(康有爲)도 중국 고대서적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서 영감을 얻어 제시한 이상향과도 비슷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인민공사가 토지는 물론 가옥, 가축을 소유하고 각 부락의 행정기능을 맡았다. 농민은 집단으로 생활하며 공동으로 생산에 참여했다. 인민공사는 세금을 거두고 학교, 은행, 탁아소, 공공식당, 탁아소, 노인정, 공동묘지를 세우고 관리했다.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었다.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함께 했고, 빨래도 공동으로 했다. 다만 가족은 해체하지 않고 한 지붕 밑에서 살았다. 독거 가족, 즉 노인이나 고아 등은 집단에서 수용했다.

농촌에서 인민공사가 성공했다고 평가되면서 도시에도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도시공사 가운데 모범적인 곳이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홍기공사(紅旗公社)였다. 이 공사는 방직공장 내에 설치되어 4,000여 가족에 18,000여명을 수용했다. 회사 하나가 큰 마을을 이룬 셈이다. 조직원들은 잡단생활을 했고, 인민공사가 공장 주변에 포목전, 식당, 유치원, 학교, 은행, 영화관등을 세워 관리했다. 공장 주변에는 조직원들이 먹기 위한 가축 축사가 있었고, 여성근로자가 출근한 후 봉사조직이 가정일을 대신해 관리해 주었다.

집단생활은 생산성을 높일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 내 것과 우리의 것은 다르다. 내 땅, 내공장, 내 가게라면 밤을 새울 터인데, 우리의 것에는 대충 일을 했다. 생산성이 늘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적 공간이 없어지면서 사생활이 사라진데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약진운동 기간에 세워진 토법고로. /위키피디아
대약진운동 기간에 세워진 토법고로. /위키피디아

 

참새잡기와 비슷한 시기에 실시된 운동이 토법고로(土法高爐) 운동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제철기술로 만든 작은 용광로에서 농민들이 강철을 직접 생산하는 방식이다.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을 대량 생산하기에는 기술력도, 자본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인해전술로 따라잡자는 것이다.

()은 산업의 기초소재다. 마오쩌둥은 철의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산업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파악했다.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마오는 기이한 방식으로 철을 증산하려 했는데, 그것이 마을 단위의 토법고로였다. 1958년에 전국적으로 60만개의 소용광로가 만들어 졌다.

대약진운동이 성공한 것처럼 보인 것은 첫해 뿐이었다. 공산정권은 1958년 공업생산량이 전해에 비해 무려 65% 초과생산되었다고 발표했다. 이해에 기계 제작은 3배 증가했고, 석탄과 강철의 생산은 두배, 석유는 70%, 전력은 40% 늘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큰 성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런 성과 이면에는 토법고로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일반 농민들은 철강 생산에 문외한이었다. 당에선 생산목표치가 내려왔다. 마오쩌둥의 지시이므로 하위 관료들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철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제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농민들은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기존의 고철을 녹여 새 강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농민들은 고철을 주워 토법고로에 넣었다. 그것으로 목표를 채우기 힘들어 농기구와 트랙터와 같은 것을 고로에 넣었다. 나중엔 집안에서 쓰던 식기까지 용광로로 들어갔다. 어차피 인민공사에서 밥을 주므로, 가정에선 식기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불량률이 대단히 높았다. 국가기획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생산한 전체 철강 중 5분의1만이 1등급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농촌 고로에서 생산된 강재로는 철도레일에 사용할수 없고, 농기구로도 사용되기 힘들었다.

 

철광석을 수레로 실어나르는 농민들. /위키피디아
철광석을 수레로 실어나르는 농민들. /위키피디아

 

대약진운동은 주창한지 1년이 되는 1959년에 수직낙하하며 실패를 입증했다. 수량에 대한 추구는 품질에 대한 요구를 희생했다. 생산한 물건 중에 상당한 비중의 불퍙품이 나왔다. 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실용의 시대가 오면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구호보다는 전문성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공업생산은 집단화와 혁명적 열기로 늘어나지 않았다. 재래식 설비와 생산방식으론 원료 낭비가 심했고, 소용광로에서 생산된 강재는 공업용으로 사용되지 못했고 폭풍우가 불자 용광로가 무너졌다. 집단농장과 집단공장은 생산목표를 맞추기 위해 기계를 과부하가 되도록 돌렸고, 정비와 수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고장이 잦았다. 생산도구는 빠른 속도로 파손되었다.

 

인민공사가 오히려 감산의 원인이 되었다. 식량생산은 19582억톤에서 195916.500, 1960년에 16,000톤으로 줄어들었다. 공업생산량은 1957년을 100으로 했을 때, 1958131, 1959166, 1960161~163, 196107~110으로 가라 앉았다.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가뭄과 홍수가 겹친 탓도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참새잡이로 인한 환경파괴가 주원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안후이성에서 총인구의 18%, 충칭 15%, 쓰촨 13%, 구이저우 11%, 후난 8%가 굶어 죽었다. 전체적으로 아사자가 1,700~5,500만에 달했다고 한다. 1962년 공산당 기간당원 7.000명이 모인 칠천인대회에서 이 재난을 삼분천화 칠분인화’(三分天災 七分人禍,)로 규정했다. 30%가 천재였고, 70%가 인재였다는 것이다.

재난, 특히 인재는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 일당독재 하의 공산정권에서도 정치투쟁은 있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인사들이 혁명 목표를 내건 마오쩌둥의 정책에 의심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게릴라 전술로 혁명과업을 달성하는데는 천재적이었지만,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데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오가 제시한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의 삼면홍기(三面紅旗)에 대한 불신이 제기되었다. 불신은 신의 영역으로 추앙받던 마어쩌둥의 권위를 흔들었다. 그에 도전한 인물이 그의 오랜 혁명동지였던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참고자료>

Wikipedia, Great Leap Forward

Wikipedia, People's commune

Wikipedia, Four Pests campaign

Wikipedia, Great Chinese Famine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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