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②…류사오치, 전면에 등장
문화혁명②…류사오치, 전면에 등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2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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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격하에 마오쩌둥, 2선후퇴…펑더하이. 대약진운동 비판하다 실각

 

19533월 소련을 30년간 통치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리고 3년후인 19562월 새로 소련의 권력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무려 5시간에 걸쳐 스탈린을 비판하고 격하했다. 흐루쇼프의 해빙은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에 자유화 바람을 불어 넣었다.

중공도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오쩌둥은 급격한 변화가 중국 공산주의를 무너뜨릴수 있다고 판단하고 인민에게 조금의 자유를 주어 동유럽의 바람을 차단하고, 자신이 죽은 후의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준비했다.

독재권력의 문제점은 독재자에게 갑작스런 일이 생겨 권력공백이 생겼을 때에 순조로운 권력 승계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1953년으로 마오쩌둥은 60세 환갑을 지냈고,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후계구도를 짜두어야 스탈린처럼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1950년대말 중공에서 벌어진 우파척결대회 /위키피디아
1950년대말 중공에서 벌어진 우파척결대회 /위키피디아

 

스탈린 사후 중공의 대응 중 하나가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정책이다. 쌍백(雙百)운동이라고도 한 언론자유 정책은 19564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제기되었다. 지식인들에게 자유롭게 토론을 하도록 숨통을 열어주어 급격한 자유화 운동을 막겠다는 판단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 당과 정부를 비판했다가 나중에 후환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산당 간부들은 진짜로 말할 자유를 준다고 되풀이하고, 동유럽에서 부는 자유화 바람도 느껴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얼마 가지 않아 지식인들, 청년들,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명·대방(大鳴大放)을 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을 살인마왕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인민민주독재는 무뢰한의 독재라는 논평이 나왔다. 우한에서는 가두시위에서 공산당원을 죽이자는 구호도 나오고, 봉건주의 상징인 공자 숭배주의자도 등장했다. 중공은 타도 공산당구호까지 나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권력은 비판을 싫어한다. 특히 독재정권은 자유를 극히 혐오한다. 중공 정권이 자유를 준다고 했을 땐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었다. 신과 같은 레벨에서 추앙받던 마오쩌둥의 권위가 실추되자 공산당은 슬그머니 백화제방 정책을 철회했다. 그리고 마음껏 말을 내뱉었던 사람들을 우파 반동분자로 몰아 잡아들였다. 여기에는 지식인, 공무원, 학생, 예술가 등이 포함되었고, 그 숫자는 수십만명에 달했다. 이때 자유의 목소리를 냈다가 꺾인 민주화의 싹은 30여년이 지나 1989년 동유럽에 다시 자유화 바람이 불었을 때 톈안몬(天安門) 시위로 이어진다.

 

19569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요한 결정이 나왔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4명의 부주석을 두고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중앙서기처가 설립되었다. 또 마오쩌둥 사상을 당헌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1945년에 만들어진 당헌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을 결부시켜 만든 사상이 마오쩌둥 사상이고, 이 사상은 중국공산당의 모든 업무의 지침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8차 전대의 결정은 마오쩌둥의 일인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마오쩌둥 우상화를 배제하는 것이 골자였다. 스탈린 격하와 같은 불상사를 미리 막겠다는 마오쩌둥의 판단이 스며든 결정이라는 평가다.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 주석은 맡았지만, 류사오치(劉少奇)를 제1부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을 총서기로 임명했다. 이 개편을 통해 마오는 2선으로 물러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1선으로 올라섰다. 마오쩌둥은 실무는 후계자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일상업무에서 벗어나 책이나 쓰고 이론을 정립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했다. 살아 생전에 권력을 서서히 넘겨주어 죽은 후에 격하되는 꼴을 피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하에 태양은 하나이고, 권력은 나눠가질수 없다는 게 진리다. 왕조시대에 아버지와 아들도 권력을 나누기 어려웠는데, 인민의 국가에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금새 인민의 태양에서 빛이 가려졌다.

 

1966년 류샤우치 /위키피디아
1966년 류샤우치 /위키피디아

 

1958년 마오쩌둥이 주창한 대약진운동이 실시되었다. 첫해는 운동이 성과를 내는 것 같았지만, 1959년에 마오쩌둥 지도방침에 오류가 발견되었다. 마오주의를 밀어붙이는 ’()과 전문적 지식을 강조하는 ’() 사이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9~19613년간 안후이, 쓰촨, 구이저우, 후난성 일대에 대기근이 발생해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인민이 굶어죽는데, 공산주의고 뭐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전()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대약진운동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다만 최고지도자가 추진하는 일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고 서서히 쌓여가는 문제점을 제시하며 마오쩌둥에게 노선 수정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직을 내놓겠다는 마오쩌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959427일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에서 물러났고, 류사오치가 그 자리에 올랐다. 마오쩌둥은 그렇게 빨리 자신에게 반격이 돌아올줄 몰랐을 것이다.

 

그해 7~8월 장시성 루산(廬山)에서 당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정치국원들은 완곡하게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의 문제점을 제시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당서열 5위인 천윈(陳雲)은 인민공사의 문제점을 설명하면서 개혁을 요구했고, ‘의 병행을 주장했다.

그런데 혁명과정에서 오랫동안 마오쩌둥의 동지였던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는 성미가 급했다. 펑더화이는 루산회의에 앞서 후난과 광저우를 방문해 농촌을 시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제철소로 끌려가고 어린아이와 아녀자만 남아 농사를 짓는 참상을 목격했다. 군인이기 앞서 혁명가였던 그는 대약진운동이 잘못되었고, 마오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펑더화이는 루산회의에[서 대놓고 마오쩌둥의 개조방식이 경솔하고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는 대약진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에 한걸음 더 진입하길 바랐다면서, 인민공사가 실패했고, 마오쩌둥의 지시로 건설한 토법고로(土法高爐)20억 위안의 인민폐를 낭비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 제일주의가 경제법칙을 대신할수 없고, 경제수단에 대신할 수는 더더욱 없다면서 마우쩌둥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마오쩌둥(오른쪽)과 펑더화이(왼쪽) /위키피디아
마오쩌둥(오른쪽)과 펑더화이(왼쪽) /위키피디아

 

펑더화이는 한국전에서 중공군을 지휘한 인물로, 중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부터 소련과 거리를 두었고, 스탈린 사후 격하운동을 빌미로 반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오랜 동지였던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루산회의 직전에 펑더화이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흐루쇼프를 접견했다. 흐루쇼프는 펑더화이에게 마오쩌둥에게 대들라고 부추기며 자신이 뒷배를 보아주겠다고 했다. 펑더화이가 귀국한 후 소련은 중공과 약속한 원자폭탄 기술 이전을 철회하고 기술자를 철수시켜버렸다.

마오저둥은 팽더화이가 소련 제국주의자 흐루쇼프와 결탁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던 차에 루산회의에서 팽더화이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자 경악했다. 마오는 소련의 앞잡이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참을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결코 뒷방 노인네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팽더화이를 수정주의자로 몰아붙이고 나라를 팔고 외국의 교사를 받아 불화를 야기시킨 자라고 낙인찍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펑더화이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 둘은 자칫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간 자신들의 지위마저 흔들릴까, 두려워 했을 것이다.

결국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고,린뱌오(林彪)가 군권을 쥐었다. 펑더화이는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Liu Shaoqi

Wikipedia, Peng Dehuai

Wikipedia, Hundred Flowers Campaign

Wikipedia, Lushan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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