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다양한 종족을 단일민족으로 통합
신라, 다양한 종족을 단일민족으로 통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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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족, 맥족, 말갈족, 왜족, 부여족 흡수…한반도 중심국가 부상

 

경북 동쪽 경주분지에서 부족국가로 출발한 신라가 북으로는 함경남도 함흥 일대,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한강유역, 남으로는 경남 일대의 가야 연맹체를 복속시켜며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한반도로 건너온 예족, 맥족, 말갈족, 왜족, 부여족(고구려, 백제)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들을 격퇴하거나 흡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신라는 그 자체가 다민족 또는 다종족의 국가이고, 한반도의 여러 종족을 통합하면서 하나의 민족을 만들었다.

 

신라 김씨 왕조를 구성한 종족은 중국 북방 알타이산맥과 몽골고원을 누비던 흉노족이고, 또다른 흉노계열인 금관국을 병합함으로써 신라의 문화에는 흉노의 여운이 많이 남아있다. 강원도 일대의 말갈족과 예족, 맥족, 남해안에는 왜족의 문화가 마을유적이나, 고분 발굴 과정에서 나타난다. 중국 한족이 건설한 낙랑군의 문화 유적도 타임머신처럼 흙속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신라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사학자들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민족사를 바라보았고, 그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할 때가 됐다.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민족사학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신라의 영토 확장은 다양한 민족과 부족, 종족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신라의 삼한 통합은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토대가 형성되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신라의 영토 확장은 3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는 신라가 건국초기에 경주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를 확보하는 과정이고, 2단계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경북 내륙을 복속시켰다. 3단계로 6세기 지증 법흥 진흥 3대 임금에 걸쳐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한강유역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된다.

 

1단계) 동해안 진출

개국 초기엔 부산에서 삼척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영토확장에 주력한다. 경북 동부의 경주에 위치한 신라로선 수시로 침공해오는 왜병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해안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탈해 (57~80), 거도(居道)가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멸망시킴.

파사 23(102),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실직(悉直),압독(押督)의 임금이 항복.

파사 29(108)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병합.

 

신라가 가장 먼저 진출한 지역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시산국은 지금의 울산, 거칠산국은 부산 동래지역이다.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은 해상세력인 석탈해의 근거지로, 가야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이탈한 것을 탈해가 되찾은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왕 때 음집벌국을 병합하고, 압독이 항복해오는데, 그 지역도 경북 동부 지방이다. 실직국은 강원도 삼척을 치소(治所)로 두고 있어 파사왕때 신라는 부산에서 삼척까지 동해안을 따라 길쭉하게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비지, 다벌, 초팔국도 경주 인근에 있던 소국으로 비정된다.

 

2단계) 경북지역 내지화

신라가 영남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는 기간이다.

아달라 이사금 시기엔 계립령(156)과 죽령(158)을 열어 그 지역에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두 현을 설치했다.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는 길을 연 후에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경주와 소백산맥 고개를 연결하는 전투로 주변에 있는 소국을 병탄한다.

 

벌휴 2(185) 소문국(召文國) 정벌.

조분 2(231) 감문국(甘文國) 토벌.

조분 7(236)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항복.

조분 13(242) 고타군(古陁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첨해 16(245) 사량벌국(沙梁伐國) 토벌.

유례 14(297)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는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대가 도와 적을 패퇴시켰다. (이때 멸망 가능성)

 

소문국은 의성, 감문국은 김천, 골벌국은 영천, 고타군은 안동, 사량벌국은 상주, 이서()국은 청도로 모두 경상북도에 위치한다.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소백산맥 이남의 부족국가를 차례차례 정벌하거나 배신 가능성에 싹을 자르는 과정이다.

사량벌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신라의 속국이었지만, 배신해 백제의 편에 붙어 버렸기 때문에 석우로(昔于老) 장군을 파견해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사량벌국 이외의 나라를 정벌한 뚜렷한 이유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적혀 있지 않다. 백제 전쟁을 앞두고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 지역을 내지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반발한 이서고국이 수도 금성까지 쳐들어오는데, 미추왕을 지탱했던 김씨 세력들이 군을 이끌고 가서 석씨왕조를 도와 평정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사서에 기록돼 있다. 이서국도 신라의 제압으로 멸망했다.

물론 사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문, 감문, 골벌, 사량벌국 이외에도 경북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형성했던 나라들이 거의 모두 신라에 합병되고, 4세기 이전에 신라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선으로 확대됐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3단계) 망라사방

본격적인 영토확장기다. 이 기간의 신라 영토에 관한 설명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지증 13(512), 우산국(于山國) 항복.

법흥 19(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 항복.

진흥 11(550), 도살성, 금현성 탈취

진흥 12(551), 죽령 이북 고현 이남 10군 탈취

진흥 14(553) 한강유역 점령, 신주(新州) 설치

진흥 17(556) 비열홀주 설치

진흥 23(562) 대가야, 토벌.

 

신라의 정복국가 지배 방식은 지증왕 6(505) 주군현 제도를 실시, 하나의 행정체제로 흡수하기 이전엔 토착왕국의 지배체제의 자율권을 다소 인정하되, 배반할 경우 가차 없이 토벌하는 형식이었다.

그 첫 번째 케이스가 실직국이었다. 실직국왕이 파사 23(102)에 항복했지만, 2년후에 배반하자, 신라는 병사를 보내 토벌하고 평정해 남은 주민을 실직에서 가장 먼 남쪽 지방으로 옮기도록 했다. 토착민의 뿌리를 없애는 이른바 사민(徙民) 정책이다. 압독국도 102년에 항복했지만, 일성 13(146)에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는 실직국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이 병사를 보내 평정하고 백성을 옮기는 사민 조치를 단행했다.

속국이었던 사량벌국이 백제와 한편이 되자, 신라는 가차없이 멸망시켰다. 이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라는 복속시킨 국가나 군현으로 편제한 지역에 대해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혁거세 53(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유리 19(42) 맥국의 거수가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파사 5(84) 고타(古陁) 군주가 파란색의 소를 바쳤다.

조분 13(242) 고타군(古陁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유례 11(294) 다사군(多沙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내물 21(376) 부사군(夫沙郡)에서 뿔이 하나 달린 사슴을 바쳤다.

눌지 25(441) 사물현(史勿縣)에서 꼬리가 긴 흰 꿩을 바쳤다.

눌지 36(452) 대산군(大山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소지 18(496) 가야국(加耶國)에서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 되는 흰 꿩을 보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공품은 상서로운 새와 짐승, 즉 파란색 소, 뿔 하나인 사슴, 꼬리길이 다섯자인 흰꿩 등이다. 농사를 짓는 지역에선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조공제도는 옥저와 고구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공 제도는 그 지역의 기존 세력이 자치권을 인정받고, 상국(上國)이 그들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다. 종주국의 힘이 먼지역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채택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5세기까지는 신라가 속국에 대해 완전한 통치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일원에서 발견되는 금동관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신라에 병합된 의성, 경산, 대구, 선산 등지에서 금동관이 발견되고, 동래 창녕 양산 고령 성주등 가야 연맹의 세력권에 있었던 지역에서도 5~6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다. 소국들이 5세기 말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일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6세기 들어 신라의 힘이 강해지고, 소백산 일대에서 백제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통치 방식을 전환했다. 지증왕때 주군현 제도를 실시한 이후 부족국가 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공의 기록이 사라진다. 복속한 소국들이 주군현으로 편제돼 자치권을 잃게 되고, 따라서 신라에 세금을 내고, 군역을 제공하는 영토의 일부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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