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③…해서파관 논쟁서 시작한 피바람
문화혁명③…해서파관 논쟁서 시작한 피바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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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운동 실패후 마오쩌둥, 류사오치 경질 계획…장칭이 총대

 

해서(海瑞, 1514~1587)는 명나라 시대에 강직한 관료였다. 그는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황제가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 것을 질책했다. 해서는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하면서 아뢰기를, “천하가 폐하에게 불평한지 오래 되었는데, 신하들이 모두 폐하의 만수무강만 기원하니, 폐하의 성품이 편벽되어 있습니다. 자신만 옳다 생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으니, 폐하의 잘못이 큽니다.”고 했다. 그는 황제에게 직언을 한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황제(가정제)가 죽은 후에 풀려나 다시 훌륭한 관료로 생을 마쳤다. 그의 고향인 후난 지방에서는 그를 칭송하며 그의 스토리를 연극(湘劇)으로 꾸며 공연해 왔다.

19594월 마오쩌둥은 이 연극을 보고 비서 후차오무(胡喬木)에게 해서를 널리 홍보하라고 지시했다. 후차오무는 베이징대 역사학 교수를 역임하고 베이징시 부시장에 재직하던 우한(吳晗)에게 해서에 관한 글을 의뢰했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해서에 관한 글을 준비한 우한은 곧바로 인민일보에 해서, 황제를 비난하다란 글을 밮표했다. 그의 글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데 3개월 후인 19597월 루산 당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가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비난하며 마오쩌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비판에 분노해 그를 해직시켜 버렸다.

우한은 당권파인 류사오치를 지지하고 있던 베이징시장 펑전(彭眞)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루산회의 직후인 그해 9월 우한은 인민일보에 쓴 또다른 글에서 해서를 겁먹지 않은 용기 있는 인물로, 황제는 무모하고 편견이 많고 비판을 수용할줄 모르는 인물로 묘사했다. 역사적 사실을 빙자해 마오쩌둥과 펑더하이를 비유한 것이다. 마오는 자신의 지시로 쓰라고 한 글을 트집잡을수 없었다.

우한은 베이징의 경극(京劇)의 주문을 받고 해서파관’(海瑞罷官)이란 각본을 썼고, 해서파관은 19611월 베이징에서 처음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명나라 관리 해서 동상 /위키피디아
명나라 관리 해서 동상 /위키피디아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중국에선 혁명정신을 강조하는 ’()보다는 전문기술을 중시하는 ’()의 암투가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 총서기 덩샤오핑은 을 대표했고, 마오쩌둥은 의 지도자였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3년 대기근으로 수천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자 행정 제일선에 나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 수정을 가했다. 실용주의자들은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 대약진운동, 인민공사를 상징하는 삼면홍기(三面紅旗)의 틀은 유지하되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 새 지도부는 농민에게 개인농지를 경작케 하고, 소규모 개인공장의 운영을 허용하며, 자유시장을 인정하는 내용의 삼자일포(三自一包)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1918년 러시아 혁명직후 급격한 공산화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부분적 시장경제를 도입한 신경제정책(NEP)과 유사했다.

실용파들은 또 제국주의, 반혁명, 수정주의와의 충돌을 완화하며, 해외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삼화일소(三和一少) 정책도 통과시켰다.

 

야오원위안 /위키피디아
야오원위안 /위키피디아

 

마오쩌둥이 볼 때에는 자신의 후계자들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용파들이 공산혁명의 대의를 저버리고 자본주의를 부활하고 소련 수정주의와 타협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마오는 실용파들의 정책으로 중국공산당도 소련처럼 관료화하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정신이 소멸할 것으로 감지했다. 그는 이러자고 혁명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962년 산둥성에서 공자 탄신 기념일 행사가 공산당간부에 의해 열렸는데, 마오쩌둥은 이 사건을 봉건주의로 되돌아 가려는 불순한 행동으로 보았다.

비록 2선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마오쩌둥은 중공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10629월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을 드높이고 잘못된 길로 가는 지식분자들을 개조하기 위해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마오는 지식인들에게 농촌에 내려가 똥지게를 지며 배우라는 취지로 하방(下放)운동을 펼쳤다.

문화운동은 부인 장칭(江靑)에 의해 주도되었다. 장칭은 연극 기습백호단(奇襲百虎團)과 발레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보급해 계급투쟁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부인이 만든 연극과 발레는 찬밥 대우를 받았다.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은 노골적으로 경극을 지원하며 장칭의 작품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이 주창하고 부인이 밀어부친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소기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마오쩌둥은 그 원인을 정부와 당권을 쥐고 있는 류사우치 일파가 암묵적으로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들의 행동에 서운해 하다가 서서히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서서히 혁명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농민은 집단농장을 피하고 자경농화되어 갔고, 소련의 수정주의가 파고든다는 느낌이 마오쩌둥에게 강하게 밀려왔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류사오치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격하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믿을만한 류사오치를 골랐는데, 그도 역시 흐루쇼프처럼 돌변해 자신을 배반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갔다. 1965년초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후계자 자리를 박탈할 것을 결심했다.

 

마오쩌둥은 당장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당권파를 제거할 경우 대혼란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의 변두리를 먼저 제압하고 핵심으로 들어가 공격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대중을 동원할 계획도 세웠다.

총대는 부인 장칭이 멨다. 장칭은 일찍부터 베이징에서 공연되는 해서파관을 비판해 왔다. 베이징의 언론은 베이징시장 펑전, 당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 일파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19652월 장칭은 상하이로 내려가 상하이시 선전부장인 장춘차오(張春橋)에게 해서파관을 비판해줄 필자를 물색해달라고 했다. 장춘차오에 의해 소개된 인물은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이었다. 장칭은 야오원위안에게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쓰게 했다.

19651110일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문회보(文匯報)에 야오원위안이 쓴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가한다는 제목의 글이 게재되었다. 야오원위안의 주장인즉, 경극 해서파관이 황제에게 간언하는 봉건시대 관리를 미화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부활하려는 우파의 음모가 숨어 있으며, 나아가 펑더화이의 반역을 뒤엎으려는 저의가 보인다고 했다. 그는 해서파관에 대해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무산시키려는 한 포기의 독초라고 주장했다.

 

문화대혁명 포스터 /위키피디아
문화대혁명 포스터 /위키피디아

 

베이징 시장 펑전은 부시장 우한이 6년전에 쓴 글이 자기 문제되자 처음에는 대수롭지않게 여겼다. 중국의 언론은 당과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상하이만 해도 지방이었다. 펑전은 지방지의 일로 치부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야오원위안의 글을 베이징 언론에 전재하라고 설득했다. 마오쩌둥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다. 베이징 시당기관지인 베이징일보에는 19일 후에 야오원위안의 글이 실렸고, 며칠후 당군사위원회 기관지인 해방군보에도 게재되었다. 공산당중앙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엔 1130일에 야오원위안의 글이 전재되었다.

야오원위안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인사였다. 그는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에 의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베이징의 언론들은 그의 글을 게재한 것을 계기로 언론탄압을 우려하며 표현의 자유를 요구했고, 베이징 시장 펑전은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며 감쌌다.

마오쩌둥이 베이징 부시장에 불과한 우한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전략적이었다. 우한을 무너뜨리고 그 다음엔 펑전, 마지막으로 펑전의 배후에 있는 류사오치 주석을 겨냥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반격에 펑더화이 실각후 군부를 장악한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가담했다. 역사극에 대한 언론의 비평으로 시작된 문화 투쟁은 본격적인 권력투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Cultural Revolution

Wikipedia, Socialist Education Movement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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