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에 일제의 흔적…조선 신궁과 방공호
서울 남산에 일제의 흔적…조선 신궁과 방공호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2.2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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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직후 내선일체 강화, 독립의식 약화 위해 설립…국사당 이전 강요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 나오고, 한쪽 구석에 조선 신궁 배전터라는 팻말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신궁 15개동 가운데 일반인들이 참배하도록 사용되었던 배전(拜殿)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조선신궁 배전 터는 2013년 남산을 발굴조사할 당시에 발견되었는데, 현재까지 조선신궁의 흔적을 확인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조선 신궁 배전의 기초 /박차영
조선 신궁 배전의 기초 /박차영
조선 신궁에서 본 남산 /박차영
조선 신궁에서 본 남산 /박차영

 

남산의 조선신궁은 3·1운동이 일어난지 1년 후인 1920527일 착공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신앙을 심어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독립의식을 약화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총부지 127,900여평에 총공사비 1564,852엔의 거금을 들여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拜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拜所)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380여개의 돌계단과 참배의 길(參道)을 조성했다. 19251015일에 준공되었으며, 일제는 조선인에게도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조선 신궁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남산자락에 쌓았던 한양도성 성벽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조선 신궁 배전의 모습(1925) /박차영
조선 신궁 배전의 모습(1925) /박차영
조선 신궁 전경(1929) /박차영
조선 신궁 전경(1929) /박차영

 

경복궁 자리에 잇던 조선총독부에서 보면 신궁은 정면으로 보였다. 조선 신궁 자리는 지금의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분수대를 포함하고, 안중근의사 기념관, 남선도서관 부지도 일부 포함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신궁의 등급(社格)을 최고 등급인 칙제사(勅祭社)로 올려 예우했다. 칙제사는 천황의 이름으로 칙사를 파견해 폐백을 바치는 신사로, 조선 신궁까지 합쳐 17개가 되었다. 1945년 패전 이후 조선 신사가 제외되면서 칙제사는 16개가 남아 있다. 남산의 조선신궁은 식민지 조선의 총진수(総鎮守)로서, 조선 전체의 일본 신사들을 대표했다.

남산의 신궁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와 인간을 신격화한 메이지천황을 제신(祭神)으로 봉안해 모셨고,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신궁의 보물로 간직했다. 제사(例大祭)를 지내는 날짜는 1017일이었다.

 

조선 신궁 구조도 /박차영
조선 신궁 구조도 /박차영

 

조선신궁의 터를 잡고 건축을 한 사람은 메이지 신궁을 건축한 이토 주타(伊東忠太, 1867-1954)였다. 그는 신궁 후보지로 서울의 여러 곳을 둘러본 후 남산 한양공원 자리에 짓기로 결정했다. 일본인이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들도 남산을 영험하게 여긴 것이 낙점의 이유였다. 국유지가 많아 보상비가 적게 든 것도 이유중 하나였다.

 

남산 팔각정 옆 국사당터 표지판 /박차영
남산 팔각정 옆 국사당터 표지판 /박차영

 

당시 서울 남산 정상에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국사당은 조선 태조 4(1395) 12월에 세워졌는데 남산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해 모시는 곳으로, 무당의 기도처였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 신궁을 준공하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했다. 국사당은 1925년 현재의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기숡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현재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 팔각정이 들어서 있다.

조선 신궁의 흔적은 현재 15개 건물 중 배전(拜殿)의 기초 구조물만 남아 있다. 배전은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의 기둥이 세워진 건물이었다.

 

인왕산 국사당 /박차영
인왕산 국사당 /박차영

 

조선 신궁 언덕 쪽에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방공호가 남아 있다. 방공호는 적의 공격이나 폭격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적 목적의 지하시설물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 19371117일 칙령 제661호 방공법 조선시행령에 따라 서울 곳곳에 방공호를 팠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경희궁 옆에 있는 방공호다. 그밖에 삼청동 일대 주택가에도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

이곳 남산 방공호의 내부에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10명 정도 수용할수 있는 방이 있다. 방에서 또다른 방향으로 긴 통로가 나 있는데, 중간 지점부터 내부는 붕괴되어 있다. 현재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내부 관람은 제한하고 있다.

 

방공호 외부 /박차영
방공호 외부 /박차영
방공호 통로 /박차영
방공호 통로 /박차영
방공호 내부 /박차영
방공호 내부 /박차영
방공호 구조도 /박차영
방공호 구조도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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