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⑥…증오의 시대
문화혁명⑥…증오의 시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12.3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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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 류사오치의 부인에게 수모 줘…장시성 학살 등 수십만명 사망

 

왕광메이(王光美)는 류사오치의 여섯 번째 부인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물리학을 전공한 인재였다.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3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고 미국 스탠포드대와 시카고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땄다. 마오쩌둥은 공화국에 도움이 될 일꾼이라며 그녀를 아꼈는데, 첩의 딸로 태어나 갖은 서러움을 받으며 살아온 마오의 넷째 부인 장칭(江靑)은 그녀를 몹시 질투했다.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에 오르자, 왕광메이는 퍼스트레이디로서 남편의 외교활동을 적극 도왔는데, 중국에선 이를 치파오(장삼) 외교라며 화제가 되었다. 왕광메이가 류샤오치와 함께 버마(미얀마)를 순방했을 때 하얀 치파오와 버마의 권력자 네윈이 선물한 루비 목걸이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외신들이 화려한 중국 퍼스트레이디에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장칭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고깝게 보았다.

류사오치의 권력이 지고 마오쩌둥이 다시 떠올랐다. 부인들의 권력도 남편에 동반해 하락하고 상승했다. 1966년 류사오치가 홍위병에 끌려가 갖은 수모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장칭은 홀로 집을 지키던 왕광메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장칭의 지시를 받은 홍위병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홍위병들은 1967410일 왕광메이를 칭화대(淸華大)로 끌고 가 30만명의 군중 앞에 세웠다. 왕광메이는 장칭이 부르주아 패션이라고 트집 잡은 복장을 하고 군중 앞에 세워졌다. 몸에 착달라 붙는 치파오, 하이힐,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한 채 그는 성적 모욕을 당했다.

왕광메이는 12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장칭이 제거된 이후 1979년 석방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1967년 4월 10일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가 칭화대에서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채 홍위대에 끌려나와 군중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67년 4월 10일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가 칭화대에서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채 홍위대에 끌려나와 군중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증오의 시대였다. 군중들은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끌고와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마음껏 풀었다. 한때 영부인이었던 왕광메이의 경우는 그나마 부드러운 처벌을 받았다. 신체적 가해를 가하거나, 죽이는 경우는 허다했고, 심지어 카니발리즘을 벌이는 경우도 보고되었다.

광시(廣西)성에서는 10~15만명이 학살되었다. 살인방법도 엽기적이고 잔혹했다. 참수, 구타살해, 생매장, 돌로 치기, 익사시키기,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 등이다. 처음에는 파벌 싸움에서 시작되었다. 군부가 중심이 된 파벌과 민간이 중심이 된 4.22파벌이 서로 비난하며 충돌했다. 광저우 군구가 4.22 파벌을 반동으로 몰아 광시성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진압 작전을 벌였다. 승자는 야수가 되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진압세력은 포로의 등에 다이너마이트를 묶어 놓고 폭파시키기도 했다. 또 어느 여교사는 학생들에게 구타당해 죽었는데, 그녀의 시체는 인육 잔치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잔혹함으로 증오를 해소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듯 희생자를 가해하고 심지어 식인 풍습을 벌였다는 것이다. 1968년 여름, 홍콩과 마카오 사람들은 죽은 시체가 강물에 떠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광시성 우쉬안현의 거리벽에 마오쩌둥 어록이 적혀 있다. 이 곳에선 문화혁명 때 카니발리즘이 벌어졌다. /위키피디아
광시성 우쉬안현의 거리벽에 마오쩌둥 어록이 적혀 있다. 이 곳에선 문화혁명 때 카니발리즘이 벌어졌다. /위키피디아

 

대량학살은 광시성 이외에도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내몽골 사건, 광둥학살, 옌안학살, 후난학살 등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살극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폭력을 투쟁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이를 우더우(武鬪)라 했다. 수천만 정의 총기, 수백만 개의 수류탄, 대포, 장갑차, 탱크가 동원되었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30~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크메르의 킬링필드요, 나치의 인종학살과 다름 없었다. 공산당 공식기록에는 문혁 기간에 23만명이 살해되고, 700만명이 부상당하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했다.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라오서(老舍)는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귀가한 뒤 이튿날 시체로 발견됐고, 신해혁명에 참가한 철학자 슝스리(熊十力)는 박해를 받던 도중에 사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를 작사한 톈한(田汉)은 우파 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당했고,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리리싼(李立三)은 심판 비판을 받아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크게는 조반파(造叛派)와 보황파(保皇派)로 갈라졌다. 조반파는 낡은 것을 뒤집으려는 좌파세력이었고, 보황파는 집권세력을 보호하려는 우파세력이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직장, 지방에서도 예외없이 상급자들과 반란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주구라는 뜻의 주자파’(走資派) 또는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 강간, 심문, 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66년 11월 홍위병에 파괴된 공자묘. /위키피디아
1966년 11월 홍위병에 파괴된 공자묘. /위키피디아

 

문화혁명의 초기인 196610월까지 시정잡배로 지목받아 농촌으로 쫓겨난(하방) 사람은 전국적으로 40만명이 넘었다. 19668월 하순부터 9월말까지 40일 동안에 베이징에서만 85,198명이 쫓겨났고, 맞아서 죽은 사람이 1,772, 재산을 몰수당한 가구가 33,695호에 달했다. (진춘밍·사쉬옌 저 문화대혁명사에서)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목숨을 건졌으나, 신체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다. 지금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문화혁명 때 농촌으로 쫒겨난뒤 갖은 고생을 했다. 그때 시진핑은 삶과 죽음의 교차에 놓여 있었다.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홍위병들은 각 가정에서 공예품을 탈취하거나 파괴했다.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이 기간에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공자의 흉상이 부서지고, 유교 서적이 불태워졌다. 티베트에서만 6,000여개의 사찰이 파괴되고, 위구르 무슬림들이 무참히 학살됐다..

국가는 10년 사이에 붕괴 직전까지 갔다. 공산당 조직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수많은 당지도자들이 숙청됐고 파면당했다.

경제는 정지했다. 공업과 농업 생산은 후퇴했고, 교육제도 마비로 인해 국가는 훈련을 받을 인원을 모두 잃었다. 젊은 세대만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중년과 노년의 학자, 과학자들도 농촌으로 보내져 수년간 연구를 하지 못한채 똥지게를 져야 했다.

 

아주 귀한 과일 망고를 마오쩌둥이 하사했다고 소개한 1968년 포스터. /위키피디아
아주 귀한 과일 망고를 마오쩌둥이 하사했다고 소개한 1968년 포스터. /위키피디아

 

10년간 이어진 천하의 광란은 바로 마오쩌둥의 정권욕에서 출발했다.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을 신격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망고 열풍이다.

1968년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마오쩌둥에게 망고 한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마오는 이 망고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먹으라고 줬다. 홍위병들은 이를 선전에 활용했다. 인민일보는 주석의 망고 선물을 받고 노동자들이 기뻐서 눈물을 흘리고, 목청 높여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고 썼다.

당시 중국에선 열대성 과일인 망고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한 치과의사가 망고를 고구마에 비유했다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마오쩌둥 열풍이 빚어낸 웃픈 토픽이었다.

 

이 광풍에서 최대 득을 본 사람은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였다. 린뱌오가 군대로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문혁이 가능했다. 인민해방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하지만 마오는 권력에서 밀려나자 린뱌오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린뱌오의 인민해방군은 마오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통해 당을 공격했다. 당이 무력해 졌다. 마오는 린뱌오의 지지에 힘입어 홍()의 정책, 즉 문혁을 밀어 부쳤다.

 

홍위병이 초래한 난동은 홍위병을 부추겼던 마오쩌둥을 당황하게 했다. 19687,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홍위병 대표 다섯을 불러 놓고 극좌적인 경향으로 파벌의식을 조성하며, 미친 듯이 날뛰며 자기들끼리 죽고 죽인다고 비판했다. 마오는 눈물을 글썽이며 당신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마오는 문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분노를 조절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문화혁명은 결국엔 권력투쟁으로 결말지어졌다. 문혁파들은 대중에게 계급투쟁을 선동했지만, 결론은 마오쩌둥이 류사오치의 후계구도를 취소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물색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마오쩌둥이 지목한 후계자는 린뱌오였다.

 


<참고자료>

Wikipedia, Cultural Revolution

Wikipedia, Guangxi Massacre

Wikipedia, Violent Struggle

-현대 중국사(), 이매뉴얼 C.Y., 까치, 2013

문화대혁명사, 진춘밍, 나무와숲,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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