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캐리비안 해적, 영국인 존 호킨스
최초 캐리비안 해적, 영국인 존 호킨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5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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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초의 노예무역상, 스페인 무적함대와 전투에 참여, 기사작위도 받아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ś)1521년 신대륙 멕시코의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를 함락하고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인구가 20~30만 쯤되고, 스페인의 대도시 세비야와 코르도바보다 큰 도시라고 했다. 그는 호수로 둘러싸인 이 아즈텍 문명의 수도 안에 엄청난 황금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521813일에 스페인군의 총공격이 단행되었다. 이날로 남은 아즈텍 전사들은 전멸하고, 아즈텍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코르테스 군은 테노치티틀란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곳에서 나온 보물을 바리바리 실어 본국 스페인에 보냈다. 그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다. 테노치티틀란의 보물을 실은 배가 대서양 아조레스 제도 앞을 지날 때 프랑스 해적선이 습격해 나포했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약탈한 보물을 프랑스 해적이 다시 약탈한 것이다.

 

카리브해의 해적은 아메리카 신대륙이 개척되면서 곧바로 생겨났다. 우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신대륙을 나눠먹기로 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불만을 품었다. 두 나라의 지구 독점에 동의하지 않는 탐욕가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배를 노렸다. 너희가 가져가는 것이 무주물(無主物)인데, 내가 그것을 빼앗는다고 탈이 되겠느냐는 심보다.

 

존 호킨스 /위키피디아
존 호킨스 /위키피디아

 

그 선구적인 인물이 영국인 존 호킨스(John Hawkins, 1532~1595).

존 호킨스는 영국 남해인 플리머스(Plymouth)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플리머스 시장을 지냈으며, 자기 소유의 선박을 가지고 상업활동을 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20살 즈음에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 도움이 있었는지 영국 국왕의 사면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영국 메리 여왕과 스페인 필리페 2세가 결혼하도록 중매에 나선 이력이 있다는 설도 있다.

23살이던 1555, 그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를 보고, 노예무역이 큰 장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프리카-영국-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Triangular trade)에 뛰어들었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노예무역 개척자로 평가 받는다. 영국 상품을 가져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고, 그 흑인을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 팔고, 그곳에서 설탕과 은을 영국으로 가져오는 방식이다. 이 재정거래(arbitrage)로 그는 큰 돈을 벌었다.

그가 삼각무역에 뛰어들 무렵,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아프리카는 포르투갈, 아메리카의 멕시코와 카리브해 섬들은 스페인의 영토였다. 결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당국이 모르게 밀무역을 하거나 때론 해적질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그의 무역거래는 합법화되어 있었다. 1562년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세척의 배를 구입한 다음 서아프리카 시에라레온을 거쳐 카리브해로 갔다. 그는 카리브해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해 그 안에 있던 흑인 노예 301명을 빼앗았다. 그는 도중에 스페인 해군에 두 척의 배를 빼앗겼지만, 산토도밍고에서 노예를 팔아 많은 이문을 남겨 투자자에게 충분한 배당을 나눠 줬다.

그의 두 번째 항해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투자를 했다. 당시로는 대형선인 700톤급 배에다 작은배 3척을 딸려 서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서 수백명의 흑인들을 싣고 베네수엘라로 갔다. 그곳의 스페인 당국자는 영국 무역선의 입항을 거절했지만, 그는 스페인 당국자들의 눈을 피해 다른 항구를 다니면서 흑인 노예를 원하는 식민자들에게 현지 식민자들과 거래했다.

 

산후안 데 울루아 요새 /위키피디아
산후안 데 울루아 요새 /위키피디아

 

호킨스의 사략선이 카리브해를 어슬렁거리자, 스페인 왕실이 발끈했다. 스페인은 영국인이 카리브해에서 무역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영국 여왕은 겉으로 호킨스를 나무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항해는 1567년에 이뤄졌다. 앞서의 두 번 항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 500여명을 싣고 카리브해를 떠돌며 스페인 당국의 눈을 피해 장사를 했다. 거래를 마치고 카리브해를 북상하다가 태풍을 만나 멕시코의 산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úa)에 기항했다. 현지 스페인 관리는 영국 배인지 모르고 입항을 허가했고, 호킨스 부하들은 입항하자 곧바로 요새를 점거했다.

이틀후 스페인 함대 13척이 나타났다. 호킨스의 부대와 스페인 군과의 전투가 치열한 벌어졌다. 호킨스는 겨우 탈출에 성공했지만, 피해가 막대했다. 그는 겨우 살아 영국으로 도망쳤다.

호킨스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항해에는 6촌 동생인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함께 했다. 드레이크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도 대영제국의 영웅이기 앞서 해적이었다.

 

1568년 산후안 데 울루아 전투도 /위키피디아
1568년 산후안 데 울루아 전투도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황실 해군으로는 스페인과 대적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략선 또는 해적들이 영국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힘으로 스페인과 싸워주길 바랐다. 후에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영국 해군에 기용되는 것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혜안 덕분이었다.

호킨스는 세 번의 항해 후에 밀무역 또는 해적 활동을 중단하고 해군에 입대했다. 그도 드레이크와 함께 무적함대와의 역사적 전투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호킨스는 1562년에 아메리카산 담배를 영국에 최초로 수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다. 그는 다시 해적질이 그리웠던지, 1595년 드레이크와 함께 27척의 선박을 이끌고 에스파냐령 서인도 제도를 습격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상에서 병사했다. 나이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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