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 전설이 내려오는 서울 마포 토정동
토정 이지함 전설이 내려오는 서울 마포 토정동
  • 강낙규
  • 승인 2022.01.1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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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을 짓고 산 곳, 갯벌과 무인도 개척해 빈민 구제…토정비결 저자로 추정

 

아직도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믿지는 않더라도 심심풀이로 볼만하다 하겠다.

토정(土亭)은 조선중기 문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호다. 이지함은 서울 마포강변에 흙()으로 집()를 짓고 스스로 호를 토정이라고 했다. 그가 쓴 역술서가 토정비결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 토정동(土亭洞)이 있다. 이 곳은 이지함의 토정이 있었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으로, 그의 집터는 토정동 138번지, 지금의 한강삼성아파트가 있는 자리로 추전된다. 현재 그곳엔 기념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 시대엔 한성부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이었다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토정리(土亭里)가 되었다. 1941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식으로 토정정(土亭町)이 되었으며, 194410월 신설된 마포구에 편입되어 마포구 토정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을 동()으로 고쳐 토정동이 되었다. 토정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용강동(龍江洞) 관할하에 있다.

근처에 회나무골이 있었는데, 회나무가 있던 골짜기라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토정동 위치 /네이버 지도
토정동 위치 /네이버 지도

 

이지함은 본관이 한산(韓山)인데,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화담 서경덕(徐敬德) 문하에서 공부했다. 목은 이색(李穡)6대손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웠고, 형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후일 이지함은 지번의 아들인 조카 산해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산해가 태어났을 때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의 조카 이산해(李山海)는 북인의 영수가 된다.

이지함은 천문, 지리, 의약 등에 능통했고, 벼슬을 하기 전에 마포 강변의 흙집에서 살았다. 그는 마포 강변에서 소금과 어물 장사(魚鹽商賈)를 해 많은 곡식을 마련하여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

토정은 또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개척해 2~3년만에 몇만 섬의 곡식을 마련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는 흙집(초정) 옆에 곡식을 쌓아 놓고 굶주린 백성들, 특히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마포 토정동에는 이지함을 기념하는 표석과 조각이 세워져 있다.

 

마포구의 이지함 상 /박차영
마포구의 이지함 상 /박차영
이지함의 구휼활동을 재현한 조각 /박차영
이지함의 구휼활동을 재현한 조각 /박차영

 

이지함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다가 1573(선조6)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현감으로서 백성의 가난 해결을 위해 경제적 방안을 상소하고, 임진강 범람을 예견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또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쓰다가 1598년 재임 중 순직했다.

그는 우리나라 실학(實學)의 효시로도 알려지기도 하는데, 1686(숙종12) 보령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되었고, 1761(영조37)에 문강공(文康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지함의 묘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그와 그의 형제, 존비속 등 14기의 묘소가 함게 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명당자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끌고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포 토정동의 기념비 /박차영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포 토정동의 기념비 /박차영
충남 보령의 이지함선생묘 /문화재청
충남 보령의 이지함선생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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