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만큼이나 굴곡 많았던 ‘아리랑’의 출판
김산만큼이나 굴곡 많았던 ‘아리랑’의 출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1.22 18: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헬렌, 1937년에 장지락 만나…국내에선 1984년 출간, 2005년 유공자 인정

 

조선의 혁명운동가 김산(장지락)의 인생이 험난했던 것처럼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심한 굴곡을 거치며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시인인 헬렌 포스터 스노우(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중국 공산당의 거점 옌안(延安)에 도착한 것은 19373월이었다. 남편 에드가 스노우( Edgar Snow, 1932~1949)가 마오쩌둥의 초청을 받아 한해 전에 먼저 옌안에 도착했고, 헬렌은 1년후에 국민당이 공산당을 포위하기 위해 쳐놓은 삼엄한 장애물을 뚫고 공산소비에트의 임시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헬렌은 그해 여름에 옌안에서 중국공산당 조선인대표 장지락(張志樂)을 만났다. 장지락은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당시 32세였다. 헬렌은 음모형 혁명가 장지락의 말문을 트게 하는데 성공했다. 영어 대화는 짧았지만 장지락은 영문 해독에 능숙했고, 필답과 서로 아는 중국어를 통해 대화가 가능했다. 30세의 미국 여류작가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조선 남성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스토리에 감명을 받았다. 두 사람은 조선 혁명가의 삶과 투쟁을 책으로 출판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22차례나 만났다. 장지락이 비밀 요원이어서 이름을 드러낼수 없다고 하자, 헬렌은 그에게 김산(金山)이라는 가명을 지어주었고, 헬렌은 자신의 별명인 님 웨일즈(Nym Wales)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님 웨일스는 김산의 인생스토리를 정리했다.

 

헬렌 포스터 스노우 /위키피디아
헬렌 포스터 스노우 /위키피디아

 

김산(1905~1938)11살 때인 1916년에 집을 나와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3·1운동 직후에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1921년 일본에 유학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선으로 난카이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국 학생과의 갈등으로 자퇴했다.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黃埔)군관학교와 중산(中山)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하고, 창당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1922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대목은 1927~1928년 광둥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 활동이다. 김산은 중공 최초의 공산정권이자 소비에트에 참여했다. 김산의 증언은 초기 중공사의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홍콩으로 탈출해 상하이, 베이징에서 활동했으며, 두차례나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조선인이란 이유로 일본 경찰에 넘겨져 또다시 심신의 상처를 받았다. 그는 석방되어 중국 공산당에 복귀했지만, 당내 반대그룹의 의심을 받아 노동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는 두차례나 중국인 여성동지와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상대는 류링(劉玲)이란 여인이었는데, 두 사람은 베이징에서 잠시 함께 살았다. 김산이 만주에서 체포된 이후 류링의 소식이 끊어졌다. 아마도 혁명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아내는 자오아핑(趙亞平)이란 중국 여인이다. 김산은 19368월에 자오이핑을 베이징에 둔 채 조선인대표로 옌안으로 갔다. 김산은 옌안에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산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 과목을 가르치던 중에 1937년에 헬렌을 만나 자신의 인생담을 털어 놓았다. 헬렌은 김산이 구술한 내용을 7권의 노트에 담았다. 김산은 책을 2년간 연기해달라고 했다. 마무리해야 할 과업이 출판으로 인해 잘못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당시 옌안은 중국 공산당 치하, 그 바깥은 국민당 치하, 베이징은 일본 관동군 점령지였다. 헬렌의 원고는 국민당에도, 일본에도 불리한 내용으로 가득찼다. 그녀는 이중삼중의 경계망을 뚫고 1938년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했다. 헬렌이 옌안을 떠날 때만 해도 김산의 신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헬렌은 에드가와 함께 상하이로 갔다가 1939년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1941년 헬렌은 필리핀에서 탈고하고,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처음 출판했다. 책은 곧 사라졌다. 조선의 한 혁명가에 관해 미국인들이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곧이어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미국은 일본의 예속국, 그중에도 조선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관료들은 이 책을 참고했고, 헬렌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95310월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직후여서 일본에서도 반공주의가 팽배했고, 이 책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일본에서 두 번째 판은 1965년에 출판되었는데, 그 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아리랑’ 미국 초판 /위키피디아
‘아리랑’ 미국 초판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에는 일본어 번역본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서슬퍼런 반공주의에 눌려 책은 지하에서 소수가 돌려보는 수준이었다.

언론인 리영희씨는 1960년 봄, 도쿄의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해 구입했다고 한다. 리영희씨는 그 책을 잃은 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고, 언젠가 잃어 버렸는데, 소설가 박경리씨가 읽고 돌려주더라고 회고했다.(동녁, ‘아리랑추천의 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번역서가 나온 것은 1984년이다. 전두환 정권이 강압 통치의 일부를 풀었을 무렵이다. 이건복씨가 경영하는 도서출판 동녘이 저자의 동의도 없이 미국판 원본을 가져와 번역해 출판했다. 리영희씨에 따르면, 이건복씨는 미안함의 표시로 미국 동붂부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던 헬렌에게 적지 않은 성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헬렌은 자신의 글이 한국에서 출판된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출범한 후 김산 또는 장지락이란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아리랑을 읽은 사람들은 김산이 무정과 함께 중국파 또는 옌안파라는 이유로 숙청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다. 아니면 오랜 망명생활과 고문 등으로 인해 지병으로 안고 있던 결핵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었다.

그런데 헬렌 스노우는 나중에 김산이 옌안에서 비밀리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김산은 헬렌이 옌안을 떠난 직후에 트로츠키주의자또는 일본 스파이라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를 처형한 인물은 중국의 베리야로 불리며 공산당 내 반대파를 무참하게 숙청한 캉셩(康生 (1898~1975)이었다. 캉셩은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김산의 처형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헬렌이 알기에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도 일본의 스파이도 아니었다. 다만 김산은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들이 별도로 조직을 만들어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김산의 논리는 중국공산당 휘하에 각 민족을 통일하려는 마오쩌둥파에 의해 부정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아리랑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김산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산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가오융광(高永光)이다. 아들의 성이 다른 것은 김산이 죽은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 아버지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헬렌은 김산의 아들 가오융광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19831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고 결의했다. 이 결의로 인해 김산, 아니 정지락은 그동안의 명예를 회복하고 당원자격을 회복했다.

김산은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사회주의계열에 대해서도 항일투쟁 등을 인정하기로 함에 따라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고, 그의 아들 가오융광이 서울에 와서 훈장을 받았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손호철 교수가 2008년에 가오융광을 만났는데,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조선족이라는 느낌은 받았어요. 그러다가 대학생이 된 뒤에야 아버지가 조선족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이야기해줘서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가오융광은 중국어로 번역된 아리랑을 읽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요. 2005년 아버지의 훈장을 받으러 한국에 갔었는데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인정해줘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71215일 베이징대 학생들에게 김산을 소개했다. “마오쩌둥 주석이 이끈 대장정에도 조선 청년이 함께 했다. 그는 한국의 항일군사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출신으로 광주봉기에도 참여한 김산이다. 그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수를 지낸 중국공산당의 동지다.”

정작 김산이 추구한 공산국가 북한에서는 아리랑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없다. 김일성만을 항일영웅으로 받드는 폐쇄사회에 그보다 7살 나이가 많은 선구자를 소개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장지락을 언급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