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③…코끼리 전투 뛰어든 왕비의 죽음
태국 역사③…코끼리 전투 뛰어든 왕비의 죽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1.2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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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크메르 제압하니 서쪽 버마가 침공…버마와 300년간 전쟁 벌여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와트와 앙크르톰은 오랫동안 밀림에 폐허로 파묻혀 있다가 1860년 프랑스 생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에 의해 발견되어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는 흥분해서 여행 노트에 이렇게 썼다.

사원의 하나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솔로몬의 궁전과 비견된다. 아마도 세계의 어느 건축물도 이렇게 성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건축물보다도 장엄하다. 하지만 지금 그 나라는 몰락하고, 야만의 상태만 남아 있다.”

크메르 제국의 이 장엄한 석조건축물을 폐허로 만든 세력은 바로 타이족이다. 10세기 이후 타이족이 중국에서 남하할 때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은 크메르 제국이 쥐고 있었다. 한자로 진랍(眞臘)으로 불렸던 크메르 제국은 시엠립을 중심으로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등 거대한 석조건축물을 만들어 제국의 위용을 자랑했다. 후세인들은 앙코르 제국이라고도 했다. 크메르는 인도차이나 북부에서 한발한발 내려오는 타이족 왕국에 의해 잠식되어 갔다. 타이족이 건국한 수코타이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경쟁자였고, 또다른 타이족의 국가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숨줄을 끊어 놓았다. 중국에서 쫓겨났던 타이족이 크메르 제국을 내몰고 2세기만에 인도차이나의 주인이 된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크메르 제국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크메르 제국의 첫 타이족 도전자는 1238년에 짜오프라야 강 중류에 건국한 수코타이 왕국이었다. 수코타이는 서부에서 크메르 제국 군대를 몰아내며 대등한 지위에 올랐다.

그 다음에 크메르를 괴롭힌 타이족은 아유타야 왕국이었다. 1350년 우통이 건국한 아유타야는 소승불교를 받아들이고, 인도의 법률제도를 정착시키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우통은 1352년에 크메르를 공격해 크메르의 왕위계승권을 빼앗았다. 5년후 크메르 왕가가 다시 왕권을 회복했지만 아유타야와 크메르와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1393년 아유타야의 라메수안 왕이 앙코르를 다시 점령하고 왕자로 하여금 크메르를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곧바로 크메르 족이 반란을 일으켜 라메수안의 아들은 살해되었다.

아유타야의 끈질긴 침공에 크메르의 최후의 황제 바롬 리치 2(Barom Reachea II)1431년에 앙코르(시엠립)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프놈펜으로 천도했다. 크메르 제국의 왕실은 모두 프놈펜으로 옮겨갔으나, 일부는 앙코르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유타야의 왕 보로마라차 2세는 앙코르를 공격해 자신의 아들을 통치자로 세우고 600년 역사의 앙코르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1,000여개의 사원, 민속무용등을 압살하고, 대신과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시엠립 일대는 아유타야 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후 심각한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면서 찬란했던 제국의 수도는 무너져 내렸고, 타이인들은 방치했다. 찬란했던 앙코르는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크메르인들은 프놈펜을 중심으로 왕통만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역사학자들은 아유타야 왕국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를 버린 1431년을 앙코르 제국의 멸망 시기로 본다. 12세기에 제작된 앙코르와트 부조에 용병으로 참여한 것으로 그려진 타이인들이 앙코르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크메르 제국의 멸망에 대해 다른 원인들로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다. 201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진은 앙코르 제국의 몰락이 장기간 지속된 가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앙코르톰을 만든 자야바르만 7세가 대승불교를 도입해 소승불교를 믿는 대중들과 유리되어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분석도 있다. 어쩻든 앙코르 제국 몰락의 결정적 이유는 아유타야 왕국의 침공이었음은 부인할수 없다.

 

아유타야 왕국은 동쪽의 크메르 제국을 제압한 이후 타이족의 또다른 나라 수코타이, 란나 왕국을 제압해 속국으로 삼았다. 아유타야는 1448에 수코타이 왕국을 합병헤 타이족의 왕국을 확대했다. 또 독립적이었던 지방에 중앙의 관리를 파견해 중앙집중화를 강화했다.

아유타야 왕국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석권할 즈음에 서쪽 버마에는 타웅우 왕조(Toungoo dynasty)가 여러 왕국을 통합한후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버마와 태국의 전쟁은 1547년에 시작되어 1849년까지 20차례나 전개되었다. 양국에 왕조가 바뀌어도 서로 싸웠다. 두 민족은 300년간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다가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가 밀려오면서 싸움을 중단했다.

 

수리요타이 왕비 동상 /위키피디아
수리요타이 왕비 동상 /위키피디아

 

이 두나라의 숙명과 같은 전쟁의 첫 대결은 154810월부터 15492월까지 4개월간 전개되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서로 다른 종족이 영토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종교는 불교로 같았다. 아유타야에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졌고, 버마는 그 틈을 타서 침공한 것이다.

버마군 12,000명은 파주지세로 타이족의 수도 아유타야로 향했다. 버마군은 코끼리를 탱크로 삼고, 머스켓 소총으로 무장했다. 청동제 대포도 갖추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동남아에서 소총과 대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동남아에 서양문명이 더 빨리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태국왕 마하 차크라팟(Maha Chakkraphat)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수도 서쪽에서 방어진을 쳤다. 태국군의 병력은 6,000. 버마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태국군은 버마군에 밀려 퇴각했다. 수도가 위협을 받았다.

드디어 태국 왕이 직접 출전했다. 그는 왕비 수리요타이(Suriyothai)와 공주, 왕자를 대동하고 전쟁터로 나갔다. 왕비와 공주는 남자 복장을 하고 코끼리에 올랐다.

적장 타도 담마 야자(Thado Dhamma Yaza)는 태국 왕에게 병졸들을 죽음에 내몰 필요가 없이 왕과 직접 대결하자고 제의했다. 차크라팟 왕은 버마 장군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전투 중에 결투를 할 때에 대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벌이는 게 동남아시아의 관례다. 그런데 국왕이 적의 장군과 결투를 벌이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역사가들도 있다. 어쨌든 둘은 코끼리 결투(Elephant duel)를 벌였다.

결투가 시작되면서 태국왕이 밀렸다. 국왕이 탄 코끼리는 겁에 질려 도망쳤고, 적장이 뒤쫓아 갔다. 왕비가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을 구하러 자신이 타고 있는 코끼리를 몰고 대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버마 장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왕비를 창으로 내리쳤다. 왕비의 몸뚱이는 난자되었고, 함께 타고 있던 공주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왕비와 공주가 코끼리에서 떨어졌다. 버마 장군은 자신이 창을 내리치는 순간에 상대방이 왕비와 공주인줄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남장을 했기 때문이다. 왕비가 코끼리에서 떨어지자 왕자들이 뛰어 들어 적장을 에워쌌다. 땅에 떨어진 왕비와 공주가 숨을 헐떡이며 웃을 풀어제치니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적장은 그들이 왕비와 공주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틈에 차크라팟 왕은 수도 아유타야로 퇴각했다.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 강을 비롯해 3개의 강이 둘러싸고 있는 하중도(河中島)에 세운 도시였다. 왕이 수도로 들어온 이후 상류에서 홍수가 나 강물이 불어났다.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포위하늗데 성공했지만 진입할수 없었다. 비가 오면서 대포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코끼리가 늪지대를 건너지 못했다. 결국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버마와 태국의 첫 전투는 수리요타이 왕비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Khmer Empire

Wikipedia, Angkor Wat

Wikipedia, BurmeseSiamese War (1547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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