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④…조선과 교류 시도한 아유타야 왕조
태국 역사④…조선과 교류 시도한 아유타야 왕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1.30 12: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말에 사신 파견…조선 태조, 배후를 사절단장으로 태국에 파견

 

아유타야 왕조는 1351년에서 1767년까지 416년을 이어갔다. 이는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내려와 나라를 세운 역사의 절반을 가로지른다. 이 기간을 우리 역사에 대입하면 고려말 몽골지배하에 있던 충정왕 3년에서 조선 영조 43년에 해당한다.

아유타야 왕조와 조선은 교류를 시도했다. 그 기록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태국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민족은 기록의 민족이라 할만하다.

교류의 시도는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인 공양왕 3(1391)에 시작된다. 이 시도는 조선이 건국한 후인 태조 6(1397)에 종결된다. 7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태국과 조선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자.

 

고려 공양왕 3(1391)

태국 아유타야 왕조는 고려말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왔다. 그 기록이 고려사공양왕 3(1391) 73일자에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의 번역을 인용한다.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내공(奈工) 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며 글을 올려 이르기를, “섬라곡국왕이 이번에 내공 등을 사신으로 삼아서 배에 토산물을 싣고 가서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성명과 봉한 표식이 없이 작고 동그란 도장만 있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그것이 위조일까 의심하여 의논하기를, “믿을 만하지 않으나, 또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또한 오는 사람들은 거부하지 않고 후대하는 것이니, 멀리서 온 사람들을 예로써 대하되 그 글은 받지 않아서 의혹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들을인견하여 노고를 치하하니, 대답하기를, “무진년(1388)에 명을 받고 배를 띄워, 일본에 이르러 1년을 머물렀는데, 오늘에서야 귀국에 이르러 전하를 보게 되니, 행역(行役)의 괴로움을 바로 잊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뱃길의 여정과 원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북풍이 불면 40일이면 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은 웃통을 벗었고 어떤 이들은 맨발이었는데, 높은 사람은 흰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싸맸고, 그 복종(僕從)은 존장(尊長)을 보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냈는데, 세 번 통역을 거쳐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라메수안 왕 /위키피디아
라메수안 왕 /위키피디아

 

이 시기는 유럽인들이 동아시아로 오는 해양루트를 개척하지 못했을 때다.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때는 14985월이었으니, 그보다 100여년전의 일이다. 서양인이 오기 전에 동아시아 해역엔 중국과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베트남, 일본의 무역선이 왕성하게 오갔다. 호주의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15~18세기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상무역이 매우 활발했는데, 주로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등 토착 아시아인들의 활동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섬라곡(暹羅斛)은 중국 발음으로 셴뤄후, (Siam), 즉 태국을 의미한다. 이후 태국을 의미하는 국호는 섬라(暹羅)로 줄여 등장한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태국인들이 자국을 떠난 때가 1388년인데 그때 태국 왕은 아유타야 왕조의 라메수안(Ramesuan)이었다. 라메수안 왕은 영토를 확대하고 대외교역을 장려한 국왕이었다.

당시 고려는 섬라라는 나라를 인지하고 있었다. 공민왕 때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섬라는 물론 占城(참파, 남베트남), 安南(베트남), 爪蝸(자바), 勃泥(브루나이i), 三佛齊(스리위자야, 인도네시아), 眞臘(캄보디아)가 중국에 조공사절단을 파견한다는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

아유타야 왕조는 중국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여러차례 조공사절단을 보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아유타야 조정은 1371년에서 1374년까지 10번이나 조공사절을 보내자 명나라가 이렇게 빈번하게 사절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주지시켰다고 한다. 아유타야 왕조는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과도 무역을 했으며, 일본과도 교역활동을 했다. 공양왕조에 나오는 내공(奈工)이 고려에 들르기 전에 일본에 1년간 체류했다고 한 사실은 일본과 잦은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고려사에 등장하는 태국인 내공(奈工)은 누구인가. 조흥국 교수(부산대)의 견해에 따르면, ()는 태국어 나이(nai)에 해당하는데, 태국 국왕에게 속한 무역선의 한 선장이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는 것이다. 명나라 실록에 따르면, 1371년부터 1612년까지 중국에 온 84명의 태국 사신 가운데 28명이 나이란 칭호를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의 태조실록에 ()’라고 표기하면서 태국 관직 이름이다는 주석을 달았다. 그렇다면 고려말에 온 내공은 태국 왕실 무역선의 선장이자 사무역 상인으로 간주된다.(조흥국)

이 태국인은 고려에 도착하기 전 1년 동안 일본에 체류했다고 했는데,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는 그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1288년에 출발해 1391년에 고려에 도착했는데, 일본에 있었던 1년을 제외하고 2년간 어디를 돌아 다녔을까. 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대만, 류큐 등에서 무역활동을 하다가 일본을 들러 고려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태국인들은 동아시아 바다의 무역풍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을 따라 북상했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남하했다. 북상하는 시간이 40일 걸렸다고 했다.

아유타야의 왕실무역상 내공은 엄청난 모험가였고, 개척자였다. 고려에는 태국어를 하는 통역관이 없어 3번의 통역을 거쳤다고 하는데, 그 중간 통역어가 중국어 또는 일본어가 아니었을까.

고려사는 처음 보는 태국인을 흥미롭게 서술했다. “어떤 이들은 웃통을 벗었고 어떤 이들은 맨발이었는데, 높은 사람은 흰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싸맸고, 그 복종(僕從)은 존장(尊長)을 보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했는지 상상이 간다.

태국인들은 토산물을 바치며 교류를 하지고 했지만 고려는 교류에 응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명분은 공식서한이 없는데다 인장의 불분명함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고려왕권의 불안정이었을 것이다. 공양왕은 허수아비 왕에 지나지 않았다.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태국인이 도착한 이듬해(1392)에 이성계는 왕권을 찬탈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건국 다음해(1393)에 태국 사절단이 다시 찾아온다.

 

태국 사신단의 행로(추정) /구글지도
태국 사신단의 행로(추정) /구글지도

 

조선 태조 2(1393)

태조실록 2(1393) 616일자에 태국인이 다시 온 사실이 적혀 있다.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는 그 나라 관직 이름이다장사도(張思道)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말에 이어 두 번째 태국 방문객이 온 것이다. 잊번에는 숫자가 20명으로 2년전의 8명에 비해 많다. 사절단장의 이름도 적시되어 있다. 장사도라는 중국식 이름인 것으로 보아 사절단장이 화상(華商)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을 토대로 스토리를 만들어 본다면, 고려말에 온 내공이 태국에 돌아가 고려를 소개했고, 새로운 무역상이 대규모 상단을 꾸려 찾아왔다. 그 사이에 한반도엔 왕조가 바뀌었다.

태조실록은 태국인의 조공품목을 적어두었는데, 소목 1천 근, 속향 1천 근과 토인 2명이다. 蘇木은 태국에서 흔한 나무로 붉은색 염료로 사용되었고, 速香은 향과 의약품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들이 바친 물량 1천근은 중국에 바친 1만근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었다. 이번에도 태국 왕실의 공식서신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신정부와 무역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온 것으로 보인다. 우두머리의 직급을 나이()라고 한 점도 왕실무역상일 가능성을 높게 한다.

주목되는 대목은 토인 2명이다. 이들은 말레이반도 또는 인도네시아 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무역상에 팔린 노예로 관측된다. 앤서니 리드의 연구에 따르면 전근대기 동남아 해안에 광범위한 노예무역이 행해졌다고 한다. 이들이 노예로 잡혀 조선의 조공품으로 진상된 것이다. 사람을 조공품으로 진상하는 것은 동양의 관례였다. 공녀가 그 예다. 태조는 토인 2명에게 대궐문을 지키게 했다. 구경거리로 삼은 것이다.

이성계는 정권을 잡은 후에 태국과의 교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사실도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태조 3(1394)

태조실록 태조 375일자의 기록이다.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약탈당하여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이성계는 裵厚에게 회례사(回禮使)라는 직함을 주어 장사도 일행이 귀국하는 길에 태국으로 파견했다. 회례사는 사신의 방문에 고맙다는 표시로 파견하는 사절단이란 의미다. 裵厚는 고려 조정에서도 외교관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배후는 조선이 태국에 보내는 최초의 외교사절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사절단이 일본까지 갔으나, 거기서 왜구의 공격을 받아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다. 오히려 태국인 대표 장사도는 태국으로 돌아갈 배 한 척을 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태조는 재난을 당한 장사도를 극진해 대우했다. 태조실록(139487)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경(禮賓卿)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었다.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 아유타야 /위키피디아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 아유타야 /위키피디아

 

조선 태조 5(1396)

조선의 첫 태국 사절 배후는 태국에 도착했을까. 태조 51396711일자 기록을 보자.

이자영(李子瑛)이 일본에서 왔다. 당초에 자영(子瑛)이 통사(通事)로서 예빈소경(禮賓少卿) 배후(裵厚)와 함께 섬라곡국(暹羅斛國)에 회례사(回禮使)로 갔다가, 그 사신 임득장(林得章) 등과 더불어 돌아오다가 전라도 나주(羅州)의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왜구에게 붙잡혀 다 죽고, 자영만이 사로잡혀 일본으로 갔다가 이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외교관 배후는 통역관 이자영을 동반하고 태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귀국길에 나주 앞바다에서 외국에 붙잡혀 배후는 돌아오지 못하고 이자영만 살아서 돌아왔다. 태국 왕실은 조선의 사절단에 임득장이라는 사절을 붙여 보냈다. 이번에 오기로 되어 있는 임득장도 화상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조선의 사절단이 태국에 도착했다. 배후는 조선왕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을 것이다. 아유타야 왕궁도 방문했을 것이다. 아뿔싸, 배후는 다 와서 나주 앞바다에서 왜구에 붙잡힌 것이다. 고려말 이후 조선초가지 왜구가 극심했다. 동북면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조정에서 성공한 군인으로 출세한 것도 왜구토벌의 공이 컸다. 극성스런 왜구에 의해 조선의 사절단이 귀국 도중에 붙잡힌 것이다. 배후는 그후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일본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배후와 함께 돌아오기로 했던 태국 사절 임득장은 다음해에 조선을 찾아온다.

 

조선 태조 태조 6(1397)

태조실록 6423일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섬라곡국(暹羅斛國) 사자(使者) 임득장(林得章) 6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왔으므로, 득장(得章) 4인에게 각각 옷 1습씩 하사하고 종인(從人)에게도 주었다.”

 

조선의 사절단이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태조는 아마도 태국과의 무역거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생한 임득장과 그 부하들에게 옷 한 벌씩을 선물하고 돌려보낸 것 같다.

동남아시아 역사 연구자 조흥국 교수는 배후와 이자영이 아유타야 왕국을 전혀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사료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기록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사료를 뛰어 넘어 상상력을 발휘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록유산도 없다. 태조실록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조선의 최초 태국 사절 배후와 통역관 이자영은 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후 조선과 태국 사이의 교류는 중단되었다. 왜구가 중간에 방해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더 이상 태국과의 통상외교를 추진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조선 지도층도 대외무역에는 소극적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상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조흥국, 조선 왕조 건국 전후 태국과의 교류에 관한 역사적 고찰, 2008, 대동문화연구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Ramesuan (king of Ayutthaya)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