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⑥…임진왜란에 등장하는 섬라 병사
태국 역사⑥…임진왜란에 등장하는 섬라 병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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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조정에서 태국군 참전 논의…양광총독 반대로 무산, 귀화자만 개별 참여

 

임진왜란 때에 태국인이 머나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숫자가 몇 명인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明軍)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기록이 국제적으로 공신력을 인정받는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선조실록 26(1593) 410일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아뢰었다. 신이 또 (명나라 장수) 부총병 유정(劉綎)을 문안하였는데 (유정은) 거느리고 있는 섬라(暹羅도만(都蠻소서 천축(小西天竺육번득능국 묘자(六番得楞國苗子서번 삼색(西番三塞면국(緬國파주(播州당파(鏜鈀) 등 투화(投化)한 사람들을 좌우에 도열해 서게 하고 차례로 각각 자신의 묘기를 자랑하도록 하여 종일 구경시켰습니다.“

선조실록의 섬라(暹羅)는 샴(Siam), 즉 태국을 의미하고, 투화(投化)는 귀화를 뜻한다. 즉 명나라 장수 유정은 조선의 국방장관인 이항복에게 자신의 군대가 다민족 국가임을 자랑하면서 그 중에 태국인이 끼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태국인은 중국에 귀화한 사람이므로, 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파견한 군대라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명나라가 태국군을 임진왜란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가 무산시킨 것은 분명하다. 이에 관해 명나라와 조선의 기록에 남아 있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문도 있다. 다만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 당시의 양국의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태국군의 임진왜란 참전 논의과정을 재구성해 보자.

 

조선의 조공사절단이 1624년 해로를 따라 명나라로 가는 그림. 청나라가 만주를 차지해 육로 길을 막는 바람에 해로로 양국 사절단이 오갔다.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조선의 조공사절단이 1624년 해로를 따라 명나라로 가는 그림. 청나라가 만주를 차지해 육로 길을 막는 바람에 해로로 양국 사절단이 오갔다.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15924(이하 음력), 일본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내달라는 이유로 조선을 침략했다. 선조는 허겁지겁 평양을 거쳐 의주로 달아났다.

왜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명나라는 처음부터 태국과 류큐(琉球, 오키나와의 왕국)의 해군을 끌어들일 계획을 구상했다. 전쟁 발발 두달후인 선조실록 25(1592) 626일자명나라는 먼저 허의후(許儀後)를 통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유구(琉球) 등과 결합하여 병사를 합쳐 일본을 정벌하여 무찌르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어 명의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이 조선에 서신을 보내 이미 민(()의 장수에게 섬라와 유구 등 제국의 군사를 연합해 배를 띄워 곧바로 일본 소굴을 치라고 명령했다고 전했다.(선조실록 251115) 명 조정은 광둥·광시의 양광총독을 통해 태국 왕실에 해군 동원령을 내렸다고 조선에 통보한 것이다.

그러면 명나라가 태국과 류큐의 해군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명의 해군력이 취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명나라는 왜구의 준동을 억제하기 위해 해금령(海禁令)을 내리고 해상운송·무역·어업 등 해양 활동을 금지시켰다. 백성들에게 일체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왜구가 침략하면 육지에서 방어한다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해군력을 키우지 않았다. 조선도 중국의 정책을 본받아 섬 주민을 철수시키는 등 해안경비를 소홀히 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를 정규부대로 전환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하자, 명은 해군력이 강한 태국과 류큐를 끌어들일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명의 계획은 그해 병력지원을 요청하러 베이징에 간 조선의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 정곤수(鄭崑壽)에게 알려졌다. 정곤수는 15929월 중순부터 10월말까지 베이징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전란도 /위키피디아
임진왜란 전란도 /위키피디아

 

명나라 병부는 조선의 사신에게 태국이 파병을 자원한 것처럼 설명했다. 정곤수가 귀국후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선조실록 2512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정곤수가 "섬라(暹羅)의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여 상본(上本)하여 조선을 구원하기를 청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 그 청을 준허(準許)하였으므로 내년 봄에 군사를 내어 일본을 정벌한다고 하였습니다" 고 아뢰었다. 선조실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태국 아유타야 왕실이 조선 지원을 위해 파병을 원했고, 명나라가 허락한 것이 된다.

정곤수의 보고에 선조는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 이르기를, "일본은 원 세조(元世祖)도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섬라가 어찌 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조는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에 실패한 것을 예로 들며 태국 해군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명나라 기록인 명사(明史) 신종실록에도 섬라의 사신이 조선 구원에 참여하겠다고 청해 병부상서가 군사를 도원해 일본으로 치라고 명령했다고 쓰여 있다. 실제는 그 반대다.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石星)이 태국 사신에게 먼저 군사를 동원해 일본을 치라고 요청한 것이다. 석성은 조선과 섬라의 사신을 자신의 집에 동시에 초대해 중재하기도 했다. 그때 섬라의 사신의 성은 이()라고 했다.

섬라의 사신은 정곤수와 별도로 만낫다. 정곤수가 자신의 문집인 백곡집(栢谷集) 부경일록(赴京日錄)에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부경일록은 1592928일에 아유타야 사신 이씨의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석 상서가 우리를 두 번이나 부른 것은 필시 섬라에게 일본을 협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화살은 사람을 뚫지 못하고, 검은 날카롭지 못하며, 총알은 꿰뚫지 못하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군대로 왜적으로 공격할수 있겠는가.“

태국 사신의 말인즉, 상국 병부상서의 지시라 노(no)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파병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군사총책임자 석성은 정곤수 일행에게 섬라, 류큐 등에게 내년(1593) 4월에 일본을 직접 치고 조선으로 가서 왜적을 소탕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부경일록) 정곤수도 태국군의 참전이 명나라 병부의 견해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유적들. /위키피디아​
​아유타야 왕국의 유적들. /위키피디아​

 

명 조정은 병부의 건의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태국 등 동남아 지역을 관장하는 양광(광둥·광시)총독에게 태국의 파병여부를 조사토록 했다. 양광총독 소언(蕭彦)은 상황을 파악한 후 반대의견을 냈다.

명사 소언전에 이렇게 설명했다. ”소언은 섬라가 서쪽 끝에 있고, 일본에서 1만리인데 어떻게 큰 바다를 건널수 있겠는가 하면서 그런 논의를 그만 둘 것을 청했다. 석성이 소언의 말을 따르지않았다. 섬라의 군사들도 나오지 않았다.“

명사는 태국군의 임진왜란 참전 논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섬라가 군사를 몰래 보내서 일본을 치고, 그 뒤를 견제하겠다고 요청했다. 석성이 그것을 따를 것을 주장했으나, 양광총독 소언이 불가함을 견지해 그만두었다.“ 명사의 기사 중에서 섬라가 요청했다는 부분을 석성이 요구했다라고 고치면 내용이 정리된다. 명나라 병부가 태국 아유타야 왕조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양광 총독이 저지한 것이다.

그러면 양광총독 소언은 왜 태국의 파병을 반대했을까. 명사 신종실록(159316)에 그 답을 제시한다. 소언은 바닷길이 멀고 섬라(蠻夷)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일단 태국에서 일본까지 거리가 멀어 해군 파병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430년전의 장비로 병사와 군수물자를 그 먼거리로 이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설사 파병을 한다치더라도 태국군이 남지나해, 동지나해를 거치며 중국에 식량과 보급물자를 요청할 것이고, 중국측이 이를 지원해야 한다. 게다가 중국 연안에 활개를 치던 해적세력들이 태국군에 붙을 경우, 태국 해군은 합법적으로 거대한 해상세력을 형성할수 있다. 그래서 양광총독은 남쪽 오랑캐(만이)를 믿을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국군의 한반도 파병은 무산되었다.

 

다만 개별적으로 중국에 귀화한 태국인들은 명군에 합류해 전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전쟁이 난지 둘째해인 1593년 초에 한반도로 왔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명나라의) 병부주사 원황(袁黃)이 임금에게 유구(琉球)와 섬라(暹羅) 등에 명해 왜노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습니다고 이뢰었다.“ (159316)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가 의주에서 와 임금에게 이번에 사천(泗川귀주(貴州) 병사와 섬라국(暹羅國) 사람들이 모두 왔습니다고 아뢰었다.“ (159344)

 

한편 당시 태국의 상황도 임진왜란에 병력을 보낼 여건이 되지 못했다. 당시 태국은 아유타야 왕조(1351~1787)였고, 파병이 논의되었을 때 왕은 나레수안(Naresuan)이었다.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을 받아 수시로 수도가 포위되었고, 버마의 속국으로 있다가 나레수안에 의해 1584년 버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후 버마 왕 난다 바인은 왕세자 밍기 스와에게 군대를 주어 태국을 치게 했다. 조선이 전화에 시달릴 때 태국은 버마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 15931, 나레수안왕은 버마의 왕세자 밍기 스와와 코끼리 결투를 벌여 승리했다.

설령 명 조정이 태국의 파병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나레수안 왕은 파병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양광총독은 태국의 실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병논의를 중단시킨 것이다.

 


<참고자료>

김영진, ”임진왜란 초기 제3국 국제협력 방안에 대한 고찰“, 2019, 국제학논총 제29

조흥국, ”임진왜란에 대한 태국의 실용 외교와 중국의 이이제이“, 동남아시아연구, 2009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Wikipedia,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Nares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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