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⑧…파리·로마에 나타난 샴 사절단
태국 역사⑧…파리·로마에 나타난 샴 사절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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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 대왕, 대외개방 추진…프랑스 끌어들여 네덜란드·영국 견제

 

태국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보다 일찍이 유럽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외교사절단은 1680년에 파리와 로마를 방문,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 14, 교황 클레멘스 9세를 알현했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 박지원이 청나라 여름 궁전을 다녀와 신기한 듯 열하일기를 써내려간 시기(1780)보다 100년 앞섰고, 일본 막부가 미국의 검은 군함에 화들짝 놀라 개항을 한 때(1858)보다 200년 가까이 먼저 일어난 일이다.

아유타야 왕국의 문호를 외국에 활짝 연 군주는 나라이(Narai, 재위 1656~1688) 왕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그는 왕국을 최고 번영으로 이끈 군주로서, 추종자들에게 대왕(the Great)으로 불리며 존경받았지만, 국수주의자들에게선 나라를 서양 열강에 종속화시켰다는 불만을 사기도 했다.

 

1685년 나라이 왕이 롭부리의 왕궁에서 프랑스 제주이트 선교사들과 함께 망원경으로 월식을 관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685년 나라이 왕이 롭부리의 왕궁에서 프랑스 제주이트 선교사들과 함께 망원경으로 월식을 관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나라이 대왕은 집권 과정에서부터 외국군대를 끌어들였다. 아유타야 왕조에는 유교문화권의 장자승계의 원칙이 없었고, 왕이 죽으면 관습적으로 형제계승이 우선시되었다. 165688일 부왕 프라삿통(Prasat Thong) 왕이 죽자, 장남 차이(Chai)가 곧바로 이어받았다. 다음날 차이의 삼촌인 시수탐마라차(Si Suthammaracha)가 배다른 동생 나라이와 손잡고 권력을 찬탈했다. 시수탐마라차가 왕에 오르고, 나라이는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시수탐마라차는 권력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들에 좌지우지되었다. 새 군주와 후계자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호색한이었던 시수탐마라차가 나라이의 누이 라차 칸라야니를 범하려 했다. 라차는 도망쳤고, 삼촌은 라차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병사들로 하여금 그녀의 집을 에워쌌다. 라차는 책 궤짝에 숨었고, 그 궤짝은 그녀의 방을 빠져 나가 나라이에게로 옮겨졌다. 나라이는 누이의 사연을 듣고 분노해 병력을 동원했다.

나라이가 쿠데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페르시아, 일본인 용병을 동원하고, 형제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인 정착민들은 앞서 프라삿통 왕 재위 때에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이의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 쿠데타 D-데이는 이슬람의 아슈라 명절로 잡았다. 그해 아슈라 축일인 1026, 네덜란드, 페르시아, 일본의 혼성 병력은 궁궐을 기습해 왕을 체포하고 즉시 처형했다. 그렇게 해서 나라이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국왕에 올랐다.

 

나라이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나라의 요구를 무시할수 없었다. 또 외국의 발전한 문물을 적극 배우고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태국 주변의 상황은 급변했다. 북쪽 중국에선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권력 교체가 진행되었다. 서쪽엔 영국이 인도를 잠식하며 동진해왔고, 남쪽 인도네시아엔 네덜란드가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때까지 인도차이나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몰락한 남명(南明)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永曆帝)가 버마(미얀마)로 피신하자, 청나라는 버마를 공격했다. 수도 아바(Ava)가 청군에 함락되자 버마는 휘청거렸고, 나라이 왕은 그 틈을 이용했다. 1662~1664년 전쟁에서 나라이 대왕은 6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곤, 파간, 버마 주요부를 휩쓸고 다녔다. 나라이 왕은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버마 세력을 내쫓고 영토로 만들었고, 말레이반도의 메르귀(Mergui)를 점령했다.

나라이는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네덜란드의 무한한 팽창을 우려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보르네오섬, 말레이반도, 대만, 일본으로 세력을 확장,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려 했다. 네덜란드인 박연, 헨드릭 하멜 등이 조선에 도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664년 네덜란드는 태국에서의 모피 독점권을 얻기 위해 아유타야를 포위하기도 했다. 이에 나라이 왕은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선택했다. 태국식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인 셈이다.

대왕은 말레이반도 인도양 쪽에 있는 메르귀에 프랑스군 요새를 짓도록 허용하고, 방콕 항구에 프랑스의 조차를 허용했다. 또 그는 짜오프라야 강 지류에 있는 롭부리(Lopburi)에 유럽식 왕궁을 짓고 수도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아유타야에서처럼 네덜란드 함대에 봉쇄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아유타야 왕국의 사절 코사 판이 1686년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나라이 왕의 서신을 전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유타야 왕국의 사절 코사 판이 1686년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나라이 왕의 서신을 전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나라이 대왕은 세계 각국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시도했다. 아유타야는 프랑스, 영국, 바티칸은 물론 페르시아, 인도와 외교관계를 추진했고, 중국과 아시아의 이웃나라에도 친선사절단을 보냈다.

나라이는 특히 프랑스와의 우호를 강화하려 노력했고, 프랑스도 태국의 성원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최강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태양왕 루이 14세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못지 않게 아시아 진출을 원했다.

1673년 루이 14세가 보낸 카톨릭 사제단은 프랑스왕과 교황 클레멘스 9세의 서한을 들고 나라이왕을 알현했다. 나라이 대왕은 답례로 1680년 피야 리팟코사(Phya Pipatkosa)를 단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파리와 로마에 보냈다. 불행하게도 최초의 유럽행 태국사절단은 귀국길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 근처 해상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태국과 프랑스의 외교사절단의 파견이 이어졌다.

1686년 태국 사절단이 프랑스에 도착한 일화가 전해진다. 태국인들은 프랑스 서안 항구 브레스트에 도착해 베르사이유로 향했다. 연도에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외국인과 이국적 풍물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태국식 어좌인 부사복(busabok)을 이동시키며 행진을 했다.

베르사이유에 도착한 사절단은 루이 왕에게 태국식으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왕의 선물을 올렸다. 선물에는 금, 거북이 껍질, 웃감, 카펫, 도자기, 가구, 태국산 은제 대포 등이 포함되었다. 사절단은 파리의 화려함에 놀라 궁전을 장식한 거울 수천개를 주문하고, 프랑스제 대포, 망원경, 안경, 시계, 옷감, 크리스탈 장식품 등을 구매했다.

 

1688년 아유타야의 사절단이 교황 인노센트 11세에게 나라이 왕의 서한을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1688년 아유타야의 사절단이 교황 인노센트 11세에게 나라이 왕의 서한을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나라이 왕의 친유럽 정책은 콘스탄틴 폴콘(Constantine Phaulkon)이라는 그리스인에 의해 극치를 이룬다. 폴콘은 그리스에서 태어나 어려서 영국 상선에서 선원 생활을 하다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적을 두고, 영국-네덜란드와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말레이어에 능숙했다. 또 태국어도 배워 태국인들의 통역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에 태국 왕립 무역상 코사 렉(Kosa Lek)을 알게 되었고, 코사 렉에 의해 나라이 왕에게 소개되어 왕실 통역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682년 프랑수아 팔루를 단장으로 하는 프랑스 사절단이 왔다. 폴콘은 임기응변의 재치와 통역으로 왕의 총애를 얻는데 성공했다. 나라이 왕은 폴콘의 식견을 높이 샀다.

폴콘은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선호하는 나라이 왕의 취향에 맞추어 아이디어를 올렸다. 대표적인 것이 버마에서 뺏은 메르귀에 프랑스식 다각형 요새를 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폴콘의 제안에 코사 렉이 반대했다. 나라이 왕은 폴콘의 손을 들어주었고, 코사 렉은 그후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처형되었다. 나라이 왕은 점점 폴콘의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말년엔 폴콘이 사실상 왕국의 총리 격이 되었다. 그럴수록 아유타야는 프랑스화되어 갔다.

프랑스는 카톨릭을 앞세웠다. 제주이트 사제들은 궁궐에 들어와 왕실 가족들을 개종시켰고, 나라이 왕도 개종시키려 했다. 이에 맞서 나라이 왕의 집권에 도움을 준 페르시아도 나라이 왕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고 애를 썼다. 두 종교의 사제들이 궁궐을 오가며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 되었다.

타이족은 오랫동안 불교를 믿어왔다. 그들은 중국 윈난, 광시에서부터 불교 국가를 형성했고, 안도차이나에 이주한 후에도 현지 몬족의 소승불교를 수용해 발전시켰다. 왕실은 물론 귀족, 관료, 평민들이 불교도였다. 그런데 아니꼽게도 카톨릭과 이슬람의 이교도들이 왕궁을 들락거리며 군주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라이 왕은 카톨릭과 이슬람에 관심은 가졌지만, 끝내 어느쪽의 신앙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이 왕의 종교 포용정책은 불교에 천착한 기둑권세력의 반발을 샀다. 그들이 집단반발을 하면서 나라이 대왕의 대외포용정책은 물건너가게 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Narai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Constantine Phaulk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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