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언덕에 용산문화원이 있고, 그 뒤 작은 공원에 심원정(心遠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있고, ‘倭明講話之處碑’라고 쓰여진 비석이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지만 조선시대엔 한강을 내려다 보는 경치좋은 곳이었다.
이 곳이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왜군과 명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벌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앞에 현대자동차 건물이 서 있고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나, 400년전에는 정자 바로 앞까지 한강 백사장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용산에 서비스공장을 지을 때 그곳이 모래밭이었다.
왜 이곳에서 강화회담을 열었을까. 적진이기 때문이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용산에 사령부를 두고 군대를 지휘했다. 수운이 편리하고 한양을 방어하기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용산이 외국군의 기지가 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였다고 한다.
회담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전세가 역전된 직후에 시작되었다. 명군은 더 이상 남하하길 꺼려했고, 왜군도 한반도를 절반쯤 먹겠다고 생각을 바꾼 뒤였다. 이때도 조선왕 선조는 강화협상을 반대했다. 수백년 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상을 반대한 것처럼….
회담 당사자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였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 그대로, 왜와 명의 강화협상이다. 전쟁은 조선에서 벌어지고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당했는데 휴전은 저들만 했다. 그로부터 360년후 한국전 휴전협상에도 한국군 대표는 빠졌다. 어떻게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었을까.
회담후 왜명강화지처비를 세우고 기념으로 백송을 심었다고 한다. 백송은 2003연에 고사했지만 백송의 씨앗이 근처 바위틈에서 어린 나무로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주변엔 수령 670년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나무가 명나라와 왜의 강화회담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곳에 세 워진 정자 심원정은 고종 때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했다. 당대의 세도가 풍양조씨의 대부가 이곳의 역사가 어찌 되었건 경치가 좋으니 별장을 삼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