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⑨…프랑스 군대 내쫓은 페트라차
태국 역사⑨…프랑스 군대 내쫓은 페트라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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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밀착한 나라이 왕이 병들자 1688년 궁정쿠데타로 집권

 

아유타유 왕국의 나라이 대왕은 32년간 재위했다. 절대권력자에게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듯 했다. 나라이 왕 재위 시절에 국왕에게 아첨을 하며 권세를 휘두른 사람은 그리스인 콘스탄틴 폴콘이었고, 이 외국인은 총리와 다름 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폴콘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프랑스 군대에 의지했다. 프랑스는 방콕과 메르귀에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서양인들이 국왕 주변을 에워싸고 권력을 전횡하자 태국 본토박이들이 치를 떨었다. 프랑스 사제들은 나라이 왕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려 권유했고, 후계자로 지목되는 왕의 양아들 프라 피(Phra Pi)를 카톨릭 신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태국의 주류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불교다. 승려와 지배층은 이러다가 나라가 카톨릭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웅성거렸다. 이런 불안이 국수주의자들에게 권력 탈취의 기회를 마련했다.

 

16883, 나이 56세인 나라이 왕이 중병에 걸렸다. 그는 당대의 의술로 치유불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절대권력의 끝이 드러나자 그의 충신, 아첨가, 왕가가 각기 제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나라이 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식을 갖기 않겠다는 이상한 관념에 빠져 있었고, 처첩이 임신할 경우 낙태를 시켰다. 그래서 말년에 딸만 하나 두었다. 그는 왕족 중에서 양자를 얻었는데 그가 프라 피였다.

나라이 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페트라차(Phetracha)였다. 나이는 동갑이고, 페트라차 가문의 여인이 나라이의 측실로 갔기 때문에 왕은 페트라차를 형제처럼 대우했다. 페트라차는 당시로선 탱크부대나 다름 없던 코끼리 부대 사령관으로, 나라이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왕이 말년에 그리스인 폴콘의 말에 빠져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이고 왕실과 관료들이 속속 카톨릭으로 전환하자 페트라차는 반발세력의 우두머리로 자리잡았다. 그는 내심 쿠데타라도 일으켜 폴콘과 프랑스 세력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왕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궁궐 안팍으로 퍼져나갔다. 왕의 측근 세력들은 프랑스 군대와 카톨릭의 지지를 받는 폴콘과 민족주의자와 불교도의 지지를 받는 페트라차로 나눠졌다. 차기 권력을 놓고 두 세력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페트라차 /위키피디아
페트라차 /위키피디아

 

페트라차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폴콘은 페트라차의 쿠데타를 무산시키기 위해 프랑스군 주둔군 사령관 마샬 데파르주(Marshal Desfarges)를 찾아가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데파르주는 9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방콕을 출발, 롭부리의 궁궐을 향해 이동했다. 도중에 프랑스 동인도회사 임원이 데프라주에게 왕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며 출병을 만류했다. 데파르주는 섣불리 태국 내정에 끼어들지 않기로 결정했고, 특히 폴콘이 국내외에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폴콘은 태국인 뿐 아니라 서양인들에게서도 인기가 없었다. 그는 나라이 왕이 죽으면 자신의 권유로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계자 프라 피를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스스로 태국의 통치자가 되려 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태국의 공식 연대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증거는 없지만 그럴 개연성을 배제할수 없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서양인들이 화포를 앞세워 아시아의 나라 하나쯤은 손쉽게 들어먹던 시절이었다. 폴콘은 거들먹거리며 태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안하무인처럼 굴었다. 그의 부인 마리아 기요마(Maria Guyomar)는 궁궐 주방을 맡아 왕실 가족에게 서양식 음식을 선보이며 호감을 샀다. 태국사람들은 그런 모습들이 꼴 사나웠다.

자카르타에 본거지를 둔 네덜란드인들은 신교도여서 카톨릭을 옹호하는 폴콘이 미웠고, 영국인들은 자국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인물이 프랑스에 빌붙어 사는게 꼴 사나웠다. 인도 고아와 중국 마카오에 본거지를 둔 포르투갈인들은 이 무렵 이미 사문서나 다름 없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먹이며 프랑스군의 태국 주둔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나라이 왕의 크로말루앙 요타텝 공주 /위키피디아
나라이 왕의 크로말루앙 요타텝 공주 /위키피디아

 

나라이 왕은 병중에도 자신의 후계 문제로 나라가 어수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88510일 왕은 폴콘과 페트라차, 양자 프라 피를 불렀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공주 크로말루앙 요타텝(Krommaluang Yothathep)에게 상속권을 주며, 페트라차와 프라 피 가운데 공주가 선택한 사람이 차기 왕에 오른다는 후계원칙을 선언했다. 왕의 말은 페트라차와 프라 피 둘중에 힘센 자가 공주를 차지해 왕이 되라는 얘기나 다름 없었다.

페트라차가 칼을 뽑아들었다. 517~18일 사이, 페트라차는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의 부대와 동조세력, 불교 승려를 이끌고 왕궁을 에워쌌다. 나라이 왕을 궁궐에 유폐시키고, 양자 프라 피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65일 페트라차는 그리스인 폴콘을 체포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폴콘은 반역죄에 몰려 끝내 처형되었다.

나라이 왕은 710일 숨졌는데, 사인은 약물 중독이란 소문이 돌았다. 왕의 수명을 일찍 당겨 사태를 진정시키겠다는 페트라차의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주는 어쩔수 없이 아버지와 동갑인 페트라차를 남편으로 맞이 했다. 페트라차는 왕에 올랐고, 이때 부터 아유타야 왕국의 마지막 반푸루앙( Ban Phlu Luang) 왕조가 시작되었다.

 

1688년 태국군의 프랑스 방콕 요새 포위 /위키피디아
1688년 태국군의 프랑스 방콕 요새 포위 /위키피디아

 

페트라차는 태국 땅에서 프랑스군을 내몰았다. 먼저 메르귀 요새에 주둔한 프랑스 군이 1688624일 요새를 포기하고 태국 배를 훔쳐타고 도주했다. 그들은 인도 마드라스 근처에서 영국 해군에 나포되었다.

방콕은 이때 태국의 수도는 아니었다. 페트라차는 4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방콕의 프랑스 요새를 포위했다. 프랑스 주둔군은 200명에 불과했다. 태국군은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군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 서양세력의 목적은 프랑스를 내쫓은 후에 태국에서 이권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포위는 4개월간 지속되었다. 프랑스 함대가 방콕 항에 접안하려 했지만 태국 군의 포화에 실패했다.

페트라차는 요새에 숨어 있는 폴콘의 아내 마리아를 내놓는 조건으로 프랑스 군의 안전한 철군을 약속했다. 데파르주 사령관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풀콘의 아내는 영구히 태국왕실 주방의 시종이 된다는 처분을 받았다. 프랑스 군은 페트라차게 제공하는 배를 타고 1113일 방콕항을 떠났다.

페트라차의 조치에 대해 논란이 있다. 태국인들은 태국을 집어삼키려는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자주적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서구적 시각에서는 태국이 개방주의를 포기하고 국수주의로 돌아갔다고 지적한다.

 

프랑스 세력을 내쫓은 후에 페트라차는 서양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대신에 중국, 일본 등 동양과의 무역을 강화했다. 페트라차 재위 기간에 50여척의 중국 정크선이 아유타야를 방문했고, 30여척이 일본 나가사키를 들락거렸다고고 한다. 페트라차는 유럽 제국주의가 발톱을 드러 내려하자, 곧바로 내쫓아 버렸다. 태국에서 쫓겨난 프랑스는 베트남을 기웃거리게 된다.

태국이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재개한 것은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1856년 나폴레옹 3세 때였다.

 


<참고자료>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Siamese revolution of 1688

Wikipedia, Phetracha

Wikipedia, Na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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