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⑩…태국판 궁예, 탁신대왕
태국 역사⑩…태국판 궁예, 탁신대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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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물리치고, 분열 수습하고, 캄보디아·라오스 병합…말기에 정신이상

 

아유타야 왕국은 보롬마콧(Borommakot) 왕 재위 25(1733~1758) 동안에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 기간에 문학, 예술, 학문이 발전하고 대외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하지만 태평성대는 부작용을 유발했다. 국방이 소홀하게 취급되었고, 보름마콧 왕 사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과 고관들이 분열하며 사회적 단결력이 무너졌다.

버마에선 콘바웅 왕조라는 강력한 권력이 출현해 1759~1760, 1765~1767년 두차례에 걸쳐 이웃 아유타야를 침공했다. 첫 번째 침공은 버마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었으나, 두 번째 침공에서 아유타야는 버티지 못했다.

1765년 버마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북쪽과 서쪽의 4개 방향에서 샴을 공격했다. 버마군은 주요도시를 약탈하며 수도 아유타야를 포위했다. 이번에도 태국군은 우기의 홍수를 이용해 수도를 방어했다. 버마군은 수도 아유타야를 포위하고 장기전으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굶어죽이는 작전을 썼다.

17674월 마침내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함락했다. 마지막 왕 에카탓(Ekkathat)은 도주했으나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은 귀족들은 버마에 항복했다. 이로써 417년의 역사를 아유타야 왕국은 멸망했다.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야만적으로 파괴했다. 지금도 아유타야 유적지에는 그때 파괴된 석조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마군은 샴의 국민 수천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태국인들은 아직도 그때 버마의 잔혹함을 잊지 않고 있다.

 

버마는 샴을 오래 지배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중국 청나라가 북쪽에서 버마를 침공하자 버마는 자국 방어를 위해 태국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버마군의 철수를 이용해 전국의 태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하나가 탁신(Taksin)이었다.

(태국에서 탁신이라면, 2001~2006년 사이에 총리를 지낸 정치인을 우선 기억한다. 태국 역사에서는 1767년에 왕에 등극한 탁신 대왕이 더 유명하다. 두 사람은 영어 스펠을 달리한다. 총리 탁신은 Thaksin이고, 탁신 대왕은 Taksin이다.)

 

탁신 왕과 네 신하 /위키피디아
탁신 왕과 네 신하 /위키피디아

 

탁신은 중국계 혼혈아였다. 그의 아버지 정용(鄭鏞)은 광둥성 산터우(汕頭) 출신으로, 청 옹정제 시기에 샴으로 건너와 상인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태국 소수민족인 몬족 귀족 집안의 노키앙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3년 동안 불교 수행을 했다. 이때 그는 불교에 심취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 유력자의 양자로 들어가 군대 실력자로 성장했다. 이름은 신(Sin)인데, (Tak) 지방의 영주였다고 해서 탁신이라 불렸다. 버마가 아유타야를 침공했을 때 그는 수도를 방위하며 버마군에 저항하던 장군으로, 그의 휘하에는 병력 5,000명을 두었다.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그는 저항군을 이끌고 버마군을 무찔러 옛수도 아유타야로 입성했다. 하나, 아유타야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탁신은 아유타야를 재건하는 것보다 새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금의 방콕 시내 차오프라야 강 서편의 톤부리(Thonburi)를 수도로 정하고, 17671228일 그곳에서 샴 왕에 등극했다. 그가 왕에 올랐을 때 태국엔 다른 4개 세력으로 할거하며 지방정권을 형성했다. 탁신은 이들 세력을 하나씩 무너뜨려 1771년에 태국을 재통일했다.

탁신이 세력을 확대하는데는 당시 동남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중국인(華僑)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조는 탁신을 정왕(鄭王)이라 불렀으며, 버마를 공격하는데 우군으로 삼았다. (지금도 그의 의관을 모시는 정신의관묘(鄭信衣冠墓)가 광둥성 산터우에 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전쟁으로 일관했다. 버마군을 물리친 이후, 탁신은 캄보디아와 전쟁을 벌여 제압하고, 라오스를 멸망시키고 병합했다.

 

1767년 5개 세력으로 태국(왼쪽), 1778년 탁신왕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1767년 5개 세력으로 태국(왼쪽), 1778년 탁신왕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재위 말기에 그는 광기에 빠져버렸다. 역사가들은 그가 과도한 긴장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는 중국계 혼혈아로서 타이족에 동화해 가는 과정에서 외로움이 그를 미치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재위 14년째가 되던 1781년 그의 정신이상 증세가 자주 나타났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 개혁에도 관심을 가져 승단 정화를 위해 애쓴 군주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 수양에 침잠하면서 자신이 해탈 단계에 들어선 불교 성인임을 자처했다. 그는 자신의 피가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하는 미래의 부처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성인으로 숭배하지 않는 수도승에게 승직을 박탈하고, 매질을 하고, 노동교화형에 처했다.

연이은 전쟁으로 경제적 피로감도 커졌다. 기근이 확대되고, 약탈과 범죄가 확산되었다. 신하들의 부패도 심각했다. 탁신 왕은 부패한 대신을 고문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러는 가운데 신하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마침내 프라야 산(Phraya San)이라는 군벌이 정변을 감행했다. 반란군은 수도 톤부리를 장악하고, 탁신 왕의 항복을 받았다. 반란자들은 탁신에게 정통불교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태국 각지에서 살인과 약탈이 확산되고 치안이 무너졌다. 캄보디아 전선에 나가 있던 차오 프라야 차크리(Chao Phraya Chakri) 장군이 회군해 수도로 입성했다. 차크리 장군은 탁신왕으르 퇴위시키고, 죽여버렸다. 탁신왕은 체포되어 몽둥이로 맞아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톤부리 왕조는 탁신 왕(재위 1767~1782)1대로 끝나고 말았다.

차크리 장군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마 1(Rama I)가 된다. 이 왕조를 차크리 왕조라고 하는데, 지금 태국 왕실의 뿌리다. 현재 태국 국왕 마하 와치랄롱꼰(Maha Vajiralongkorn)은 차크리 왕조의 10대 국왕이다.

 

탁신의 의관을 보관하는 묘(중국 광둥성 산터우) /위키피디아
탁신의 의관을 보관하는 묘(중국 광둥성 산터우) /위키피디아

 

중국인 혼혈로서의 정체성, 하류 계급에서 왕위에 오른 열등감과 불안감, 종교적 열정이 탁신 대왕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했을 것이다. 신라말 궁예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의 왕조가 명분을 만들기 위해 증세를 과장했다는 것이다. 고려가 궁예를 광인으로 비하했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타이족들은 이민족 출신이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는 것을 싫어한다. 아유타야 왕국에서 그리스인 콘스탄틴 폴콘이 총리처럼 행세했을 때,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해 권력을 교체한 이력이 있다. 탁신은 부친의 고향사람인 광둥성 차오저우(潮州) 사람을 포함해 화교들에게 여러 가지 이권을 주고 그들을 고위관직에 중용했다. 그런 것들이 타이족의 반발을 샀다. 탁신이 아무리 유능한 군주였다고 했도 타이 귀족들의 눈에서는 중국인이었다. 왕이 실수하길 기다렸고, 그 실수가 타이 쇼비니즘을 자극한 게 아닐까. 탁신은 그가 가장 믿고 신뢰하던 차크리 장군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에 태국인들은 그가 외적을 물리치고 분열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영토를 넓혔다는 점에서 탁신 대왕(King Taksin the Great)이라 하며 숭배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BurmeseSiamese War (17651767)

Wikipedia, Taksin's reunification of Siam

Wikipedia, Tak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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