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모건, 해적에서 자메이카 부총독으로
헨리 모건, 해적에서 자메이카 부총독으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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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략선 사령관으로 카리브해 스페인 영토 약탈…후에 관직 받아 해적소탕 앞장

 

헨리 모건(Henry Morgan, 1635~1688)은 일개 해적에서 카리브해 자메이카 부총독에 이른 인물이다.

웨일즈 출신인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교 공부도 일찍 그만두고, 책보다는 창검을 사용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해적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버커니어(buccaneer)라는 개별적 해적으로 활동하다가 영국령 자메이카 총독의 눈에 들어 사략선(私掠船, privateer) 선대의 사령관으로 활약한다.

17세기 카리브해는 무법천지였다. 스페인이 방대한 남과 북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를 통치했지만, 카리브해 작은 섬들까지 손길을 미칠 여력이 되지 못했다. 특히 소안틸레스 열도는 명목상으로 스페인령이었지만,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다.

그 틈에 식민지 개척에 뒤늦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뱃사람들이 카리브해로 몰려 들었다. 그들 중 프랑스 사람들은 스페인령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현재 아이티)을 잠입해 살았다. 프랑스인들은 야생 소와 돼지를 잡아 부칸(boucan)이라는 가마에 훈제해 팔았다. 그것으로도 생계를 잇지 못해 자신이 소유한 작은 배로 스페인 정착지를 급습해 재산을 약탈했다. 이들을 프랑스어로 부카니에(boucanier), 영어로 버커니아라고 했다. 도둑에게 도둑이라 부르면 듣기 싫듯이 해적들도 직업이 있는양 버커니아로 부르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버커니어들은 혼자서 해적질을 하는 게 어려우므로, 무리를 지어 스페인 선박과 정착촌을 약탈했다. 스페인은 그들의 기습에 민감하게 대처했는데, 잡힌 버커니어는 사형에 처했다. 당연히 국적을 불문하고, 그들에겐 스페인이 적이었다.

 

헨리 모건이 어떻게 카리브해로 건너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민자들을 따라갔다는 설이 있다. 그는 카리브해에 있는 바베이도스(Barbados)라는 작은 섬에서 5년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때 번돈으로 자메이카(Jamaica)로 건너가 자기 배를 갖게 되었고, 25세가 되던 1660년부터 본격적으로 버커니어로 활약하게 되었다.

헨리 모건 /위키피디아
헨리 모건 /위키피디아

 

모건은 사략선 선대에 참여해 뛰어난 실적을 보였다. 다른 버커니어보다 많은 전리품을 노획해 그 업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략선 활동이 없을 때엔 여러 버커니어와 무리를 지어 해적으로 활동했다. 니카라과, 그라나다 등지를 돌아다니며 스페인 영토를 습격해 약탈했다.

1667년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자메이카의 영국 총독은 사략 행위를 적극 장려하면서 악명 높은 모건을 사략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사략선은 정부가 허용한 약탈 면허증이다. 영국 정부는 정규 해군을 파견할 여력이 없는 곳에 민간의 배에 사략 허가증을 주어 적대국 배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때 해적들도 허가증을 받아 상대국 선박과 식민지 습격에 동원되었다.

 

이제 모건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그는 카리브해에 떠도는 버커니어 해적들을 긁어 모아 사략선 함대를 구성했다. 16689척의 배에 460명의 해적을 모아 자메이카를 출발했다.

먼저 쿠바섬의 프에르토 프린시페(Puerto Principe)를 쳐들어 갔는데, 의외로 약탈할 보물이 적어 실망했다.

 

포로를 심문하는 헨리 모건 /위키피디아
포로를 심문하는 헨리 모건 /위키피디아

 

방향을 바꿔 파나마의 포르토벨로(Porto Bello)를 쳐들어 갔다. 파나마 지협의 카리브해 쪽에 있는 이 도시는 스페인이 중남미에서 형성한 보물을 모아 스페인 본국으로 실어 나르는 항구였다. 400여명으로는 부족한 인원이었지만, “병력이 적으면, 돌아가는 이득은 많다는 모건의 설득에 해적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버커니어들은 수비병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스페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해적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해적들은 수도원에서 신부와 수녀들을 끌고 와 인간 방패로 삼았다. 해적들은 신교도들이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 카톨릭 수도사들을 총알받이로 삼은 것이다.

결국은 수비병들이 투항했고, 포르토벨로는 함락되었다. 그들은 도시를 보름동안 약탈했다. 감추어둔 보물을 찾기 위해 주민들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스페인의 파나마 총독이 해적 습격을 보고받고 지원군을 보냈다. 모건은 주민들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요구했다. 10만 페소를 받아낸 후 이 약탈자들은 유유히 항구를 떠나갔다.

이 공격에서 그가 잃은 해적은 1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일당은 엄청난 금화와 은화, 노예, 화약, 무기, 실크, 향신료, 벨벳, 최고급 보석들을 빼앗았으며 그 양은 스페인 식민지 보유량의 4분의1이 되었다고 한다.

그해 또다시 함선 15척에 950명의 해적들을 모아 베네수엘라로 갔다. 그들은 지브롤터를 습격해 막대한 보물과 수많은 노예들을 빼앗았다. 스페인군이 집결해 공격태세를 갖추었지만, 몰래 바다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스페인이 영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일단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 떼었다. 하지만 카톨릭이었던 챨스 2세는 카톨릭 본산인 스페인의 요구를 묵살할수만은 없었다. 결국 모건은 본국의 명령으로 사략선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포르토벨로 유적지 /위키피디아
포르토벨로 유적지 /위키피디아

 

다시 영국과 스페인 관계가 악화하고, 스페인이 자메이카를 공격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그러자 자메이카 총독은 다시 모건을 사략선 사령관에 임명한다.

모건은 다시 선대를 구성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36척의 배에 2,000명 가까운 해적들이 참가했다. 웬만한 국가의 해군 병력과 맞먹는 부대였다.

그는 다시 파나마를 공격했다. 자신이 사략선 허가장을 만들어 해적들에게 나눠 줬다. 모건이 곧 정부였다.

1671년 모건과 버커니아들은 파나마 지협의 뭍을 지나 태평양 연안의 파나마시티를 향했다. 그곳에는 스페인의 파나마 총독이 지키고 있었다. 해적떼들과 정규군 사이에 일대 전투가 벌어졌다. 결론은 해적의 승리였다. 스페인군은 600명의 전사자를 내고 3시간 만에 파나마 시티를 내줬다. 1529년 건설된 이 스페인 식민도시는 150년만에 해적에 의해 처음으로 함락되었다고 한다. 파나마 시티는 해적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모건 일당은 3주 정도 파나마시티에 머물며 약탈행각을 벌였고, 긁어모은 재물과 600명의 포롤르 이끌로 파나마시티를 떠났다. 175마리와 노예들에게 가득 전리품을 싣고 이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건에게는 해적들에게 나눠줄 만큼 충분히 약탈하지 못했다. 돌아올 몫이 적어지자, 개별적으로 참가한 해적들의 불만이 높아져 반란의 기미가 보였다. 모건은 자신의 동료 500여명만 데리고 도망치듯 자메이카로 돌아왔다. 그때 식량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한다. 파나마 지협에 버려진 버커니어들은 목숨을 잃거나 간신히 자신의 근거지로 되돌아갔다.

 

파나마 지형 /위키피디아
파나마 지형 /위키피디아

 

자메이카 수도 포트로열로 되돌아 왔을 때, 이미 본국 영국은 스페인과 마드리드 조약(1670)을 체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자메이카를 영국에 넘겨주었지만, 반대급부로 영국 해적들이 스페인 영토에 대한 약탈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통신시설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자메이카 총독이나 모건도 조약 체결 사실을 모른채 파나마를 공격한 것이다. 어쨌든 국제조약이므로 영국은 자메이카 총독을 소환해 런던탑에 가두고 모건도 런던으로 소환되었다.

모건은 런던에 가면 크게 문책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문책은커녕 국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고 자메이카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스페인과의 조약에 따라 버커니어를 단속하라는 것이었다. 버커니어 두목이었던 모건은 단속자로 입장이 뒤바뀌었다. 런던의 정부는 결국 모건을 이용한 것이다. 스페인과 싸울 때엔 그를 해적 두목으로 활용하고, 스페인과 평화협상에 타결했을 때엔 그를 해적 소탕의 앞잡이로 활용한 것이다.

그는 그 일도 충실히 해냈다. 모건은 3개월 내에 해적질을 그만두면 땅을 줄 것이고, 계속 해적질을 하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했다. 모건의 지시에 해적들은 해적일을 포기하거나, 소굴이었던 자메이카 포트로열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중 하나가 바하마 군도였다.

1683년 모건은 관직을 내려놓고 농장주로 보내다가 1688년 세상을 떠냈다.

 

푸에르토 프린시페에서의 모건 전투 /위키피디아
푸에르토 프린시페에서의 모건 전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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