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①…러시아의 영토인가
우크라이나 역사①…러시아의 영토인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1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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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민족주의 대두…”같은 민족이라고 한나라로 있어야 하나“

 

러시아어로 우크라이나는 변경(borderland)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다. 러시아제국의 중심지인 페테르스부르크(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일대는 이민족과 대치하는 변경지역이었다.

이 보통명사가 나라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72월 혁명 직후였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하고 러시아 남부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앙 라다(Central Rada)라는 의회를 소집해 국가 창설을 논의했다. 191711월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을 수립했는데,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이자 역사학자인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에 의해 주도되었다.

곧이어 러시아에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은 1차 대전 교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에 우크라이나는 독일 점령지에 포함되었다. 1차 대전과 혁명, 반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여러 국가들이 생성-소멸되었고,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 최종 승리했다. 우크라이나는 1922년 결성된 소련(USSR)에 가입했고, 69년 후 1991년에 독립했다.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는 공화국이자, 유엔 회원국이었으나 지방정부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존재한 기간은 러시아 혁명기의 4년과 1991년 독립 이후 30여년에 불과하다. 이 객관적 사실은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해 범러시아주의자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라고 주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우크라이나 위치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위치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는 면적이 60으로, 대한민국의 6, 한반도를 합친 면적의 3배나 되며, 인구는 4,000만명을 웃돈다. 과거 소련의 13개 공화국 가운데 러시아 다음으로 큰 공화국이었다. 언어는 우크라이나어, 종족은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되지만, 광의로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족이며 러시아어족에 해당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국이라고 강조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1천여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차별화된 종족이라고 주장한다. 두 나라의 분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중세국가였던 키예프 공국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슬라브족은 흩어졌다. 남부 슬라브족은 몽골,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북부 슬라브족은 모스크바 공국에서 출발해 러시아 제국으로 다시 일어났다. 1천년 가까이 남과 북의 슬라브족은 다른 역사 과정을 거쳤고, 남부 슬라브족은 17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슬라브족을 멸시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식량공급기지로 활용했으며, 농민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1861년 농노해방령 이후에도 제정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높은 토지세와 이자를 부과하며 수탈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갔고, 지식인들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대러시아에서 독립하자는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억압하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민족 문화운동이 뿌리를 내려 갔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스토마로프(1814~1870)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싹을 틔운 인물이다. 그는 키예프 대학 역사학 교수로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도 했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교수로 복귀한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기면서, 남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과 북부 러시아인(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는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낸 역사학자다. 아버지 세르히 흐루셰프스키는 언어, 민요, 전통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적인 모든 것에 깊은 애착을 가져 이를 아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고, 아들 미하일로는 어린 시절부터 우크라이나의 민족감정을 키웠다. 미하일로는 키예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후 10권으로 구성된 역사서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를 집필했다. 이외에 우크라이나 문학의 역사’,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에 대한 개요’, ‘삽화로 보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집필했다.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의회인 중앙 라다의 의장을 역임했고, 볼셰비키에 의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가 1924년대에 우크라이나로 귀환했다.

푸틴 대통령도 흐루셰프스키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조장한 인물로 지목한다. 푸틴은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흐루셰프스키가 우크라이나 문화와 언어, 독자성을 강화하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이러한 활동이 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항하게 되었다고 했다.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왼쪽)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오른쪽) /위키피디아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왼쪽)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오른쪽)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자신을 대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 벨라루스를 백()러시아로 부르며, 세 나라가 러시아 민족의 3형제라고 부른다. 1939년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얻은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붙여주었으며, 1940년엔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를 우크라이나에 합쳤다. 이런 것들이 형제국가였기에 가능했다고 푸틴은 주장한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차르 체제 이전부터 한뿌리에서 뻗어나간 자연스런 관계라며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올린 글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형제국가로 동슬라브족이라는 한 민족임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푸틴의 대러시아주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과거 서유럽의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세기초에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프랑스가 알제리를 억압하던 구태를 새로운 세기에 러시아가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인에게는 우크라이나가 파시스트 군벌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주장한다. 언론을 통제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유대인이고, 우크라이나는 다당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2019년 선거에서 젤렌스키는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또 돈바스(Donbas) 지역에 러시아인의 봉기를 부추겨 우크라이나 내부를 흔들고 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에 스코틀랜드 출신 신교도를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독립 선언을 환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독립 선언을 환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푸틴의 주장대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한뿌리임은 역사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러시아와 따로 독립해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계기는 1930년대 기근이다. 1930년대 후반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정책과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 농민 250~350만명이 굶주림으로 아사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이때 소련 당국은 집단농장화를 반대했거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했던 우크라이나 관리들을 숙청하고, 농민 반발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을 통째로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로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중인 1941~44년에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이를 반역행위로 보았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장악력이 약화되자, 19918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12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법을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국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의 84.18%3,189만명이 투표에 참가해 92.3%의 지지로 독립이 가결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 같은 민족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어한다.

 


<참고자료>

Opinion Putin’s Obsession with Ukraine as a ‘Russian Land’

Article by Vladimir Putin ”On the Historical Unity of Russians and Ukrainians“

한정숙,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내다: 흐루셰프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정체성:,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러시아연구 242(2014)

Wikipedia, Nikolai Ivanovich Kostomarov

Wikipedia, Mykhailo Hrushe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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