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銀), 구대륙과 신대륙 하나로 연결하다
은(銀), 구대륙과 신대륙 하나로 연결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08 1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메리카 은, 중국에 대량 유입…몽골과 전쟁으로 수요 급증, 왜구 밀무역 거래

 

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유럽 세력들이 아시아로 물밀 듯 진출할 때, 동양의 패권을 쥔 나라는 중국의 명()나라였다. 명은 몽골()을 북쪽 고비사막으로 내쫓고 중원을 차지했다.

중국이라는 구대륙과 스페인이 개척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짧은 기간에 대량의 무역겨래로 연결한 매개체는 은()이라는 상품이었다.

()은 국제적으로 기축통화였으며, 중국 명나라에선 때마침 납세의 기준이 되었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국부론>에서 은의 글로벌 무역이 무서운 힘으로 전파된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구대륙의 중국과 신대륙의 남미가 하나의 상품으로 연결되는 방식에 관심 있게 관찰했다.

은이 구대륙과 신대륙을 연결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본다.

 

16세기 무역로 /위키피디아
16세기 무역로 /위키피디아

 

명 조정은 내내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시달렸다. 북방의 몽골과 동남 해안의 왜구가 명에겐 늘 골칫거리였고, 유럽인들이 아시아 바닷길을 개척한 16세기 중반에 명나라는 서양보다는 북방 오랭캐와 남방 왜구에 보다 더 신경을 썼다. 명은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서양오랭캐들을 통해 북로남왜를 격멸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취했다.

한족에 쫓겨난 몽골족은 분열을 거듭하다 16세기초 징기스칸의 직계 자손임을 내세운 알탄 칸(阿勒坦汗)에 의해 새력을 규합하면서 명을 위협했다. 명나라는 다시 전쟁준비를 했고, 백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고, 세금을 걷었다. 관리의 착취도 심했다. 군수물자 징발을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가난한 한족들이 북쪽 몽골지역으로 넘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알탄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판승(板升)이라는 도시를 건설해 주었다.

1550년 알탄의 군대가 한족 이탈 주민의 길안내를 받아 베이징을 8일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이징의 명군은 몽골의 방화와 약탈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북로의 침공에 명의 군사비가 급증했다. 명은 초기에 토지세를 쌀 또는 보리로 받았는데, 세액의 불공평과 세리의 부정이 심해 세수확보가 어려워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이에 명은 1560~70년대에 부역과 조세, 잡세등을 일원화해 납세자의 토지소유 면적과 납세자수(丁口) 수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며, 모두 은()으로 납부하게 했다.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이 개혁세법은 명나라 경제를 은본위제로 전환시켰다.

세금납부를 은으로 통일하면서 명의 세수가 증대됐다. 하지만 몽골과의 전쟁이 격화하면서 은이 대량으로 북방 전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국내에 심각한 은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세금을 내려고 해도 은을 구하지 못해 체납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명나라는 초기에 절강(浙江)성과 복건(福建)성을 중심으로 연간 100만량 이상의 은이 채굴됐다. 하지만 은 매장량에는 한계가 있고, 채굴할수록 은 생산량은 줄어 들었다. 국내산 은만으로는 유통량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해외에서 생산된 은이 필요했다.

 

알탄칸 /위키피디아
알탄칸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중국 남해안에는 왜구(倭寇)가 노략질했다. 남왜(南倭), 즉 명나라를 괴롭힌 왜구에는 상당수 중국인이 포함돼 있었다. 왕직(王直),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은 중국인으로, 유명한 왜구의 두목이다. 특히 왕직은 휘주(徽州)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의 금법(海禁令)에 걸리기보다 차라리 해외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는게 낫지 않겠는가라며 광동(廣東)으로 가서 큰 선박을 건조해 유황이나 생사를 싣고 일본이나 샴(태국),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을 일으켜 5~6년만에 큰 부를 모았다. 그는 한족 도망자들을 모으고 일본 하카다(博多) 상인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해적단을 이끌었다. 이민족들은 그를 오봉선주(五峯船主)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휘왕(徽王)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밀무역에 종사했다. 왕직은 주로 일본과 중국사이의 중계무역에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생사(비단의 원료)와 견직물, 면포, 비단, 수은, 도자기, 동전, 서적, 약재등을 구해 일본에 팔았다. 이런 물건은 당시 일본 영주들이 선망하던 물품이었다. 해적 밀수단은 몇배 또는 몇십배의 가격으로 물건을 팔았고, 그 대가로 일본에서 은을 받았다.

왜구는 16세기 중엽에 중국 동남부 해안을 겁탈했다. 명 조정은 중국인 왕직을 간계로 유인해 처형하고 해금령을 강화했다. 하지만 중국 해상세력과 연계한 왜구는 중국 남부 해안을 유린했다. 명나라는 유명한 척계광(戚繼光)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왜구 침탈을 거의 제압한다. 이후 명은 다시 유화정책으로 전환해 1567년 이후 해금령을 완화해 민간의 해상무역을 허락하는 조치를 취했다.

 

1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북방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알탄의 손자 바한나기가 돌연 명 왕조에 항복해왔다. 명 조정은 몽골에 도망간 한족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몽골은 한족을 보내주는 대신에 화의를 맺고 조공무역을 허가받았다. 1550년에 최고조에 달했던 북로남왜의 위기는 1570년 무렵에 가까스로 수습된다.

 

16세기 중반, 알탄칸 시기의 북방 대치도 /위키피디아
16세기 중반, 알탄칸 시기의 북방 대치도 /위키피디아

 

북로과 남왜의 위협이 비슷한 시기에 해결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해답을 은()의 흐름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방의 긴장은 명나라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되면 북방으로 가는 은의 흐름이 급속하게 빨라진다.

은 부족이 심해지고, 밀무역의 모험에서 나오는 이문도 높아진다. 이윤은 위험을 무릅쓴다. 위험도가 높으면 수익이 높고, 목숨 값을 치르더라도 이윤을 추구하는 부류가 생긴다. 북로의 위협이 증대되면 은의 밀무역이 성행하고 남왜의 저항계수가 높아진다. 왜구의 폭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거꾸로 북로의 위협이 약해지면 은의 부족이 완화되고 밀무역에 의한 은수요가 줄어든다. 왜구의 밀무역도 급감하게 된다. 따라서 북쪽 몽골족이 타협적으로 나오자, 은의 밀무역 수요가 줄어들어 남왜의 문제도 가라앉게 된 것이다.

 

 

1570년 이후 중국은 일본과 민간무역을 재개했다. 이에 따라 왜구의 밀무역은 급감하게 되고, 정상적인 거래를 통한 은 거래는 활성화된다. 이 무렵 일본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은의 양이 급증한다.

스페인이 남미 안데스 지역 포토시(Potosi) 은광 등을 개발해 은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는데, 신대륙의 은은 1571년 마닐라의 스페인 상인에 의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됐다. 이때 스페인은 태평양 항로를 열어 아메리카의 은을 대량으로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마닐라로 가져오게 된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블랙홀 같이 세계의 은을 흡수했다. 일본 역사학자 고바타 아츠시(小葉田淳)등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2,300톤에 이르는데, 그중 일본산 은이 1,200~1,300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7세기 전반에는 중국의 해외 은 도입량이 더욱 늘어 5,000톤에 이르렀는데, 절반 가까운 2,400톤이 일본산 은으로 추정된다.

 

왜구는 1557년 중국인 우두머리 왕직이 체포돼 살해된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급속하게 쇠퇴한다. 도요토미는 중국과의 밀무역에서 얻어진 막대한 수익에 눈을 돌린다. 그는 다이묘 휘하에서 전개되던 밀무역을 쇼군 휘하로 이전할 것을 꾀한다.

이에 도요토미는 1588년 해적단속령을 발포했다. 동시에 명나라에 정상적인 공무역을 제의한다. 명은 왜구의 도발이 재연될 것을 두려워 도요토미의 제의를 거부한다.

도요토미는 류큐등 해양을 통해 중국 남방을 직접 압박할 것인지,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16세기 대왜구 시기의 왜구진출로 /위키피디아
16세기 대왜구 시기의 왜구진출로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