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②…페레야슬라브 회의
우크라이나 역사②…페레야슬라브 회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1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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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공국 멸망후 슬라브족 분산…1654년 코사크, 러시아 차르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는 중국 북부에서 몽골, 중앙아시아, 헝가리, 불가리아로 이어지는 거대한 유라시아 스텝(Eurasia seteppe)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나라의 국기는 새파란 하늘과 드넓은 초원을 형상화했다. 건조하고 따듯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는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왔다. 우크라이나엔 드네프르 강이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평원을 형성하고, 높은 산지가 거의 없다. 남쪽은 흑해와 접해 있다. 우크라이나는 고대 이래 유목민족에게 이동로를 제공했고, 대륙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기원 이전에 우크라이나 내륙에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이 거주했고, 흑해 해안에는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도시를 건설했다. 서기 3세기에 고트족이 드네프르 강 유역에 이주해 살고 있었고, 동쪽에서 아시아계 훈족(흉노)이 침공하는 바람에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하게 된다. 훈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 아바르족, 하자르족이 이주하고, 슬라브족도 드네프르강 평원에 이주해 농업과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초의 국가는 올레그공(Prince Oleg)882년에 세운 키예프 공국이다. 키예프 공국은 슬라브족, 바랑족, 핀족의 연합국이었는데, 동슬라브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때문에 키예프 루스(Kievan Rus')라고도 한다. 이 나라의 영토는 지금의 러시아 서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포함했다. 러시아(Russia)와 벨라루스(Belarus)라는 국명은 루스(Rus)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키예프 루스는 동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는 998년경에 동로마 바실리우스 2세 시절에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이어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 형제가 만든 키릴 문자도 도입되었다.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나라 모국이 되었고, 키예프 공국이 받아들인 그리스 정교, 키릴문자는 동슬라브족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촉매제였다.

 

키에프 공국 /위키피디아
키에프 공국 /위키피디아

 

키예프 공국은 1240년 몽골족 징기스칸의 아들 바투의 원정에 의해 멸망했다. 350여년간 한지붕 밑에 있던 슬라브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슬라브족은 몽골족이 세운 킵차크 칸국 또는 금장칸국(Golden Horde)의 지배를 받았고, 몽골족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던 북쪽의 일부 부족만 명맥을 유지했다.

그중 하나가 모스크바 공국이었고, 이 작은 나라가 점점 세력을 키워 러시아 차르국으로 발전했다. 남부 슬라브족은 초원지대에 유목생활을 하며 코사크족(Cossacks)이라 불리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는 갈라치아-볼히니아(Galicia-Volhynia) 공국이 들어섰는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 공국이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계속했다고 주장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1582) /위키피디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1582) /위키피디아

 

1569년 리투니아 공국과 폴란드 왕국이 합병한 폴란드-리투니아가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장했다. 17세기에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니아, 코사크, 몽골의 잔여세력인 크림칸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무렵 슬라브족은 북쪽에 차르(tsar)의 절대군주 체제로 운영되는 러시아와 남쪽엔 헤트만(hetman)이란 수장을 앞세워 부족연맹을 구성한 코사크족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러시아와 코사크족이 키예프공국 멸망후 400여년만에 다시 결합하게 된 계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대결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초 우크라이나 일대는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은 코사크족이 살고 있었고, 서쪽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지배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사실상 폴란드 국왕이 통치했다. 폴란드는 카톨릭 국가였고, 우크라이나의 동슬라브족은 그리스정교도였다.

폴란드는 지배지역에 토지 사유화를 확대시키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그리스정교도에겐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폴란드의 농노화에 시달리던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은 동부 코사크 지역으로 이주해 합류하면서 코사크 전사의 숫자가 늘어났다. 드네프르 강 중-하류에 진영을 구축한 코사크족은 군사조직을 갖추고 폴란드와 항쟁체제를 형성했다. 코사크족은 크림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타타르족의 크림칸국과 연대했다. 크림칸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 /위키피디아
보흐단 흐멜니츠키 /위키피디아

 

16세기 중엽 코사크족에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 1595~1657)라는 지도자가 등장했다.

흐멜니츠키는 드네크르 강 유역의 치기린에서 코사크 중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타타르어, 터키어, 라틴어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폴란드의 코사크 부대에서 활약했다. 16209월 몰다비아에서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콘스탄티노플에 억류되었다. 162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1647년 폴란드 귀족과의 분쟁으로 치기린의 영지와 권리를 빼앗기고 코사크의 본거지인 자포리자 요새로 도망쳤다. 1648년 흐멜니츠키는 자포리자 코사크의 최고 지도자인 헤트만(hetman)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폴란드에 대항하는 코사크 봉기를 일으켰다. 우선 타타르족의 크림칸국을 동맹세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흐멜니츠키의 무장 반란은 농민, 도시민, 성직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군대는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를 격파했다.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군대는 16498월 폴란드군과 즈보리브 전투에서 승리했다. 코사크 부족은 폴란드와 즈보리브(Zboriv) 조약을 체결해 자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 조약은 흐멜니츠키가 독립적인 카자크 수장국을 수립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군대는 16516월에 일어난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 크림칸국의 배신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코사크 농민들은 다시 폴란드 지주의 횡포와 압제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슬라브족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코사크족만으로 폴란드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헤트만 흐멜니츠키는 오스만투르크와 교섭했지만, 그들은 미온적이었다. 마지막 시도는 모스크바의 차르였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는 1853101일 모스크바에서 전국회의를 열어 코사크를 보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러시아 차르국과 코사크 헤트만국은 같은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었다. 흐멜니츠키는 차르에게 정교 신앙과 정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영토를 차르의 보호령으로 의탁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차르 엘렉세이는 폴란드 귀족들이 정교신앙과 정교회를 박멸하려 하기에 헤트만 보흐단 흐멜리츠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1654년 1월 8일 페레야슬라브 회의 /위키피디아
1654년 1월 8일 페레야슬라브 회의 /위키피디아

 

흐멜니츠키는 코사크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러시아 차르의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165418일 그는 드네프라 강변의 페레야슬라브에서 부족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역사에 중대한 기점을 형성하는 페레야슬라브 회의(Pereyaslav Council). 이 회의에는 러시아 차르가 보낸 3명의 사절단도 참여했다.

흐멜니츠키는 부족연맹의장인 헤트만의 자격으로 각부족장들에게 안건을 제기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군주를 받들기 위해 이 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선택할 군주는 여럿이 있다. 첫째는 투르크 술탄(sultan)인데, 그는 여러차례 사절을 보내 우리를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했다. 둘째는 크림칸국의 칸(khan)이며, 셋째는 폴란드 국왕이다. 넷째는 같은 정교신앙을 가진 러시아 차르다. 차르는 우리가 오랫동안 바라던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군주를 결정해야 한다.”

폴란드는 적이고, 크림칸국은 배신을 때렸다. 투르크는 이슬람이다. 흐멜니츠키는 같은 종교인 러시아 차르를 군주로 받들자고 부족장들을 설득했고, 코사크족은 흐멜니츠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은 러시아 차르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 페레야슬라브 회의에 대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해석이 다르다. 러시아는 이 회의를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차르를 군주로 받아들인 것일뿐 코사크족의 자치권은 유지되었다고 강조한다.

1654년 회의 당시 코사크족은 러시아 사절단에게 헤트만 흐멜니츠크에게 충성맹세를 요구했지만, 사절단이 거부했고, 흐멜니츠키도 반발해 교회를 나갔다. 양측이 겨우 뜯어말려 서로에게 예의를 취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회의에서 러시아를 동맹자로 받아들였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페레야슬라브 회의에 대한 이행각서가 내려와 회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행각서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공물을 징수하며 여기서 축적된 재산으로 코사크 부대의 간부와 부대원의 봉급을 지불한다.

차르의 승인 없이 폴란드와 투르크와 외교교섭을 행하지 않는다.

키예프 성직자들의 토지 소유는 예전과 같이 허용한다.

크림칸국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 반격하지만, 선제공격은 하지 않는다.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관리가 코사크의 재판에 간여하지 않고, 코사크 재판은 코사크 회의에서 다룬다.

헤트만이 사망하면 코사크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후임자를 선출한다.

 

이 조약을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외교권을 제외하고 코사크 헤트만국의 자치를 최대한 허용한 것이다.

페레야슬라브 회의 이후 러시아와 코사크는 공동전선을 펴서 폴란드를 공격하고, 폴란드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Ukraine

Wikipedia, Pereyaslav Council

Wikipedia, Bohdan Khmelnytsky

황영삼, 페레야슬라브 회의가 러시아우크라이나에 끼친 영향과 역사적 평가, 2006, 슬라브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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